[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아베 긴야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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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아베 긴야 지음 |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8년 01월 15일 | 272P
갑작스럽게 아베 긴야의『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한길사,2008)를 음악 팬들에게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은 지난 달 소개해드렸던 버지니아 로이드의『피아노 앞의 여자들』(앨리스,2019)에 나오는 한 대목 때문이었다. 로이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활동했던 18세기 전반(前半)까지만 해도, 유럽 음악가들 사이에서 즉흥연주는 보편적인 음악 활동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화 속의 음악가들을 기리면서 그들이 모두 즉흥 연주자였다는 사실을 잊는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연주한 곡의 이름을 대보라. 아니면 판이 연주해서 추종자들이 넋을 잃게 만든 음악의 이름을. 피리 부는 사나이가 하멜른의 아이들을 제일 가까운 절벽으로 유혹하는 데 도움을 준 작곡가의 이름을. 오르페우스, 판,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들은 음악의 세계가 그 대부분의 역사 동안 그랬던 바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즉흥연주를 했다.”
1284년, 현 독일 중북부 니더작센 주에 위치한 하멜른이란 도시에 발생한 ‘피리부는 사나이와 어린이 실종 사건’을 전 세계에 퍼트린 것은 그림 형제Brüder Grimm가 수집ㆍ정리한『독일 설화집』(1816)이다. 하지만 저 사건은 그림 형제가 설화집을 내기 이전부터 독일 전역에 알려져 있었고, 사건 발생 이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노력이 끊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사건을 언급하거나 연구한 인물 가운데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도 있다.
이 사건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 세 가지가 거론된다. 하멜른에서 가장 오래된 마르그리트 교회의 유리그림과 거기에 붙은 설명문(1300년경), 하멜른의 교회에서 사용된 미사서 표제지에 붉은 잉크로 쓰여진 라틴어 시(1384년경), 뤼네부르크 수서본手書本(1430~1450년경). 가장 오래된 두 자료는 아주 간단한 두 가지 사실만을 알려 준다. ①1284년 6월 26일, 즉 ‘요한과 바울의 날’에 ②하멜른 시내에서 130여 명의 어린이가 사라졌다. 앞선 두 자료보다 약 60~150년 뒤에 기록된 마지막 자료는 위의 사실에 다음과 같은 살을 붙였다.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베저 문에서 다리를 건너 시 안으로 들어섰다. 잘생긴 얼굴에 멋진 옷을 걸치고 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남자는 묘하게 생긴 은피리를 불며 거리를 걸었다. 그러자 그 피리 소리를 들은 어린이 130명이 그 남자를 따라 나섰다가 동문을 지나 칼바리오 또는 처형장 부근에 이르러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부모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앞의 두 자료에는 없고 뤼네부르크 수서본에만 나타나는 ③이 있으니, 바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존재다.
민담ㆍ동화ㆍ신화ㆍ전설ㆍ역사는 모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민담ㆍ동화ㆍ신화가 허구인 반면, 전설ㆍ역사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전설과 역사의 차이는 전자가 문서화 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문서화된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전설은 또 하나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문과 매우 비슷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곧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이야기의 살점이 붙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법칙을 방금 확인했다. 마르그리트 교회의 유리그림과 거기에 붙은 설명문, 그리고 미사서 표제지에 쓰여진 라틴어 시는 하멜른의 어린이 실종 사건에 대해 ①②만 적고 있으나,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온 뤼네부르크 수서본에서는 ③이 덧붙여졌다.
사건이 일어난 때와 근접한 기록일수록 사실성이 더욱 높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증거와 연구 노력에 의해 최초에는 알 수 없었던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논리적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멜른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경우, 어린이를 유괴한 장본인이 피리 부는 악사였다는 훗날의 발견에는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을까?
중세에는 오늘날의 아이돌 연습생 만큼 많은 유랑악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고대 로마의 배우ㆍ마술사ㆍ곡예사가 꼽힌다. 로마가 패망하자 모든 도시의 극장이 소실되어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시골 마을이나 게르만 부족 진영에서 연극을 상연하다가, 언어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악사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여흥이라고 해봤자 가무 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랑악사의 인기도 높았을 법 하지만, 정주(定住)를 기본으로 삼았던 농경사회는 유랑생활을 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며 멸시했다. 게다가 유랑악사는 교회로부터도 배척받았다. 카를로 긴즈부르그의『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 의식』(길,2004)가 훌륭히 설명하고 있듯이, 중세 유럽은 도시ㆍ지배층과 농촌ㆍ민중이 서로 다른 신앙을 믿는 이중 구조였다. 교회는 유랑 악사를 이교 신앙을 품은 채 서민들에게 이교문화를 전달하는 무당으로 보았다.
지은이는 하멜른의 어린이 실종 사건에 “유랑악사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그럼에도 그 사건이 후일에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전설로 알려지기에 이른 것은 유랑악사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대인과 유랑예인은 “교회나 사회의 차별받는 천민이자 악행의 상징으로, 모든 불행한 사건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뤼네부르크 수서본보다 110년이나 더 늦게 쓰여진『짐메른 백작 연대기』(1565년경)는 시간이 흐르면서 원본이 왜곡되는 소문의 법칙을 실감하게 해준다. 이 연대기에 따르면, 하멜른 시에 쥐가 들끓자 쥐를 퇴치해 주겠다는 낯선 남자가 나타나고, 남자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 시민들은 쥐를 물리쳐주면 보수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남자가 피리를 불며 도시의 모든 쥐를 모아 가까운 산에 매장하였으나, 시민들은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피리 소리로 도시 안의 어린이들을 꾀어 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짐메른 백작 연대기』에서 최초로 ④‘쥐 사냥꾼’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해 ‘피리 부는 사나이’와 결합된다. 이런 결합에는 당시 ‘시민’이라고 불렸던 지배층에 대한 하층 민중들의 풍자와 조롱이 반영되어 있다.『짐메른 백작 연대기』를 쓴 귀족 출신 저자는 자신도 모른 채 민중의 도구가 되어, 민중의 의식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독일 하멜른 시에 세워져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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