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의 철학자 ] 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 프랑수아 누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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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의 철학자: 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프랑수아 누델만 지음 | 이미연 옮김 | 시간의흐름 | 2018년 11월 30일 출간 | 212P
사르트르, 니체, 바르트. 세 사람의 철학자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들이 즐겨 연주한 작곡가는 누구였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연주 실력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연주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프랑수아 누델만의『건반 위의 철학자』(시간의흐름/2018)는 이런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사람의 음악 취향과 연주 스타일은 이들의 철학과도 직간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세 사람의 철학자가 다른 악기가 아닌 피아노와 만나게 된 것은 집안에 놓인 피아노가 부르주아지 가정을 구성하는 상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아노는 아코디언이나 기타와 다르다. 사르트르는 평생 동안 부르주아를 혐오하고 조소했으나 유복한 부르주아 태생이었기에 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익혔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외할아버지 샤를르 슈바이처에게 교육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신학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며 바흐에 대한 연구서를 남기기도 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아버지 루이 테오필 슈바이처의 형이다.
어린 사르트르는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가족을 위한 오르간 연주회를 열 때마다 시중을 들었는데, 이 연주회는 사르트르에게 나쁜 기억만 남겨놓았다. “이 모든 것은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운 것, 즉 휴머니즘과 부르주아지의 전형이었다. 일요일 예배와 오르간 소리, 루터교 찬송가, 토카타는 사르트르와 음악 사이를 틀어지게 했다.” 외가에서 접한 교회음악의 해독제가 피아노였다. 사르트르에게 피아노는 오르간보다 덜 가부장적으로 여겨졌다. 사르트르와 그의 어머니 안느 마리는 슈바이처 가문의 남자들이 없을 때, 쇼팽의 발라드, 슈만의 소나타, 세자르 프랑크의 변주곡을 치면서 경건하고 엄숙한 바흐로부터 도망갈 수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
철학자들이 공식 석상에서 드러내는 음악관이 그들이 혼자 있을 때 좋아하는 음악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크세나키스와 슈톡하우젠에 관한 글을 썼고, 니체는 바그너 음악의 현대성에 대해 썼지만,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한 작곡가는 쇼팽이다. “감상과 연주 사이, 공적 담론과 사적 유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봐야할까? 사기인가 모순인가 부조화인가. 아니면 비밀스런 보수주의인가.” 사르트르에게 쇼팽을 연주하는 것은 여성적인 공간에서 쉬는 것이었다.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자 투쟁가였던 그에게 “이러한 연주는 그를 권력 없는 세계로 인도했고 선형적인 시간성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는 동안은 작가로서 느끼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무감도 과감히 벗어 던졌다.”
아홉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니체는 음악을 좋아했던 철학자들 가운데 당당히 작곡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유일한 철학자다. 그가 피아노를 처음 배울 무렵 특히 바흐ㆍ헨델ㆍ하이든ㆍ모차르트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니체의 음악 취향은 그 후로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변화의 일부만을 되풀이해 거론한다. “니체의 음악 취향에 관한 연구 대부분은 바그너와 비제에 치우쳐 있지만 니체 본인은 쇼팽에 대한 애정을 거둔 적이 없었다. 비평가들은 니체와 쇼팽의 관계에 왜 무심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낭만주의 작곡가에게는 철학적인 이야깃거리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쇼팽은 독일인처럼 심각한 정신을 소유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음악적 담론과 거리가 멀었고, 니체가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예술적 전투 장면에서도 빠져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바그너를 현대성을 흉내 내는 사이비 치유자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구원자를 자처한 자는 인류에게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신성을 통해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약속한다. 바그너는 이 형이상학적 전통을 따랐다. 바그너는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대표되는 신의 속성을 숭고로 교체하고, 대중은 바그너 음악의 극적 긴장감에 빠져든다.” 니체는 쇼팽에게서 자유, 아름다움, 우아함을 보았던 반면, 바그너 음악에서 엿볼 수 있는 집단 신앙으로부터는 전체주의가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그너리안들은 니체의 비판을 좌절한 음악가의 질투로 받아 넘기기도 하지만, 바그너를 사례 삼아 니체의 행했던 계보학적 비판은 그를 문화비판의 선구자로 만든다. 대부분의 니체 전기는 1889년, 토리노에서 채찍을 맞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가 흐느껴 우는 데에서 멈춘다. 하지만 예나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된 니체는 식당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 두 시간씩 연주를 했다. 그때 니체에게는 타인과 대화를 하는데 필요한 단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음표라는 숭고한 언어만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롤랑 바르트는 패션과 사진에 대하여, 사랑과 *라신에 대하여, 그리고 글쓰기와 이데올로기 비판(신화학)에 대하여 아주 영향력 있는 저서를 남긴 다재다능한 저자였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책도 남기지 않았으며, 음악론이라고 할만한 에세이조차 변변한 것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는 매일 오후 집필하기 전이나 외출하기 전에 어머니 곁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음악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니체만큼 창작 욕구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작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관한한 아마추어리즘의 태도를 고수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었고, 음악의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에 깃드는 순수한 행복이었다.” 이런 생각은 피아니스트에 대한 그의 선호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는 클라라 하스킬과 디누 리파티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자를 ‘완전무결한 아마추어’라고 치켜세웠고,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같은 대가급 피아니스트를 극히 싫어했다.
롤랑 바르트
지은이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바르트의 경애는 그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면서, 바르트는 독단론과 이성중심주의 철학을 피해 “학문과 학문 사이를 미끄러지듯” 떠다녔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 대상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빼앗고 전통적 형식을 종결시키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니체와 사르트르가 쇼팽을 편애했다면, 바르트가 가장 아끼는 작곡가는 슈만이었고, 그 후에 라벨을 추가했다.
*장 라신(Jean Racine) :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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