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른 ; 그 사람, 성찰하는 꼰대] - 윤춘호
- Johnk
- 조회 수 240
어떤 어른 그 사람, 성찰하는 꼰대
윤춘호 지음 | 개마고원 | 2021년 10월 29일 출간 | 308P
잡지를 사서 가장 잘 읽은 방법은 다 읽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주간지든, 월간지든, 계간지든, 잡지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는 사람은 없다. 잡지를 가장 잘 읽는 방법은 잡지를 받자마자 목차를 훑어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필자나 기획 또는 점찍어둔 연재물만 표시해두고 그것만 읽는 것이다. 바쁘다 보면 그 정도만 읽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잡지를 완독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보면 집안이 폐지 창고가 되는데다가,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자신에 실망과 죄책감마저 누적된다. 인터뷰 집을 읽는 요령도 잡지와 같다.
작년 연말, 출판사로부터 윤춘호의『어떤 어른』(개마고원,2021)을 증정 받았다. 이 책은 SBS 기자인 지은이가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고 생각되는 열세 명의 인물을 만나 인터뷰를 한 대담집이다. 나는 목차를 보고서 꼭 읽고 싶은 대담 세 편을 골랐고 곧바로 두 편을 읽었다. 첫 번째로 실린 가수 최백호 편과 열두 번째로 실린 MC 송해 편. 그리고 책을 내려 놓았다. 나머지 한 편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데『MM JAZZ』 짧은 후기를 발표하기도 전에 송해 선생이 갑작스럽게 타계를 하셨다.
최백호. 1950년생, 부산 출생. 아버지 최원봉은 1950년 치러진 2대 총선에서 스물여덟 살 나이로 부산 영도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청년 지식인이었다. 아버지는 최백호가 태어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권력에 날을 세우던 청년 정치인이었고, 그 시절은 암살과 테러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려주었고, 아버지는 죽어서도 아들에게 오래도록 나침반이자 기둥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을 들었고, 아들은 아비 잡아먹은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자였던 할아버지와 친가 식구들과 사실상 절연하고 지낸 이유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혼자 세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었다. 미대 지망생이었던 재수 중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덟 살이었다.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1977)는 어머니를 그리며 부른 사모곡이다.
데뷔곡 이후 <입영전야>, <뛰어>, <영일만 친구>같은 노래를 내놓았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라이벌이 없다. “제 생활 모토 중에 하나가 ‘삼등이 편하다, 일등과 이등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게 최고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톱 가수상을 받아보지도 못했지만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무명시절에 그는 송창식의 노래를 부르면서 지냈다. “창식이 형보다 더 좋은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욕심은 있었습니다. <영일만 친구>는 <고래사냥>을, <입영전야>도 송창식 선배의 <왜 불러>를 의식하고 쓴 곡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송창식 선배가 쓴 <우리는>이란 노래를 듣고 이거 안 되겠구나 싶었고 <사랑이야> 듣고는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했습니다.”
1995년에 만든 <낭만에 대하여>는 앨범을 낸지 1년 반이 되도록 대중에게 반응이 없다가 방송작가 김수연이 드라마에 사용하면서 대박이 났다. 이 노래로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던 경제적 어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고 무명이 아닌 무명의 설움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제가 만든 노래는 제 이야깁니다. 거짓말이 안 들어 있죠.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고 제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에서 나온 이야깁니다.” 데뷔곡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와 <낭만에 대하여> 사이에는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놓여 있지만, 두 노래가 자아내는 우수와 애상 그리고 고독의 정서는 변함이 없다. 그는 모든 가수의 노래에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인생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6월 8일, 향년 95세로 작고한 송해는 국민 의전서열 1위’라는 존경과 유명세를 누렸다. 하지만 그가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환갑이 지난 예순 한 살 때 <전국노래자랑대회>의 진행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러기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그의 부인은 구리시에서 식당을 했고 자신도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그는 일등과 거리가 멀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그는 A급 코미디언은 아니었다. 배삼룡ㆍ구봉서ㆍ이기동이 당대의 국민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웃으면 복이와요>를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980년대는 혜성같이 등장한 이주일의 독무대였고, 코미디언이 아닌 개그맨이라 불리던 후배들에 치여 그가 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1970년대 중반부터 17년간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매달렸던 것은 그가 텔레비전에 진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부터이니, 남들이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인 여든 살이 되어서야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34년 동안 한 프로그램만 맡은 사회자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송해는 곧 <전국노래자랑대회>였고, <전국노래자랑대회>는 곧 송해였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많은 상을 받았는데, 그가 유독 자랑스러워했던 상은 2004년 ‘KBS 바른 언어상’이다. 사회자가 표준어 사용과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이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의 사회가 서민적인 털털함과 함께 시청자를 주눅 들지 않게 하는 품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는 출연자들이 어쩌다 벌이는 짓궂은 퍼포먼스도 웃으면서 받아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무대에서 어떻게 한번 웃겨보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하는 일 아니겠느냐고, 내가 그것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무안하고 민망하겠느냐고.” 그는 어느 군청 관계자가 군수와 지역구 의원을 위한 특별석을 마련한 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 사람들만 특별한 자리에 앉아야 되느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2014년 세월호 여파로 <전국노래자랑대회>가 두 달 이상 결방되었을 때, 그는 방송 횟수에 따라 돈을 받는 계약직 직원들을 위해 KBS 사장과 담판을 벌였다. 그가 나서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북 출신 피란민인 그의 꿈은 자기 고향인 황해도에서 <전국노래자랑대회>를 진행해보는 거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겠다고 미뤄두었던 꼭지는 산업재해로 사망한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과의 대담이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이런 대목은 견디기 힘들다. “용군이 아빠는 그때 사고 난 이후로 심근경색 약 안 먹고 있어요. 본인도 살 이유가 없다고 해서…그때 애 아빠가 애기한 게 ‘우리 세 명 같은 무덤에 들어가 있으면 제일 행복하겠다’ 그랬어요. 지금도 애 아빠는 그런 심정이고.” 자신의 일터에서 노동자들을 죽게 만든 고용주들, 이런 일이 되풀이 되도록 방치한 정치인들, 반드시 지옥 갈 거야.
- 책 표지.jpg (File Size: 229.8KB/Download: 50)
- 1 전국노래자랑 MC로 무려 34년간 자리를 지키면서 명성을 얻은 희극인 송해..jpg (File Size: 96.3KB/Download: 55)
- 2 1977년 데뷔이후 지금까지 45년째 노래해오고 있는 가수 최백호.gif (File Size: 216.6KB/Download: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