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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첫 등단한 이후 40년 이상 시와 소설을 두루 써오고 있는 장정일 작가가 음악 이야기가 담긴 종류의 여러장르 책들을 직접 읽고서 쓴 서평, 리뷰 혹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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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 류이치 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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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저/황국영 역 | 위즈덤하우스 | 20230628| 396P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위즈덤하우스,2023)2023328, 일흔한 살의 생애를 마친 사카모토 류이치의 유고 산문집이다. 이 책은 쉰일곱 살까지의 활동을 되돌아본 자서전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홍시,2010)를 잇는 책이지만, 앞의 책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두 권의 책은 그의 음악적 성장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새 책은 투병기를 겸한다. 그는 2014년에 중인두암이 발병하여 치료됐으나 20206월에 다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음악 팬들에게 크게 두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1978년에 결성되어 테크노 팝의 선구자로 한 세대를 풍미한 YMO(Yellow Magic Orchestra)의 멤버. 그가 전 해피엔드의 호소노 하루오미와 전 새디스틱 미카밴드의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 결성한 YMO는 일본의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 중의 하나로, 그들의 인기와 영향력은 일본을 훌쩍 뛰어 넘었다. 다른 하나는 영화 음악가. 그는 베르나드로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의 음악을 맡아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이후로, 전 세계의 유명 감독들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YMO의 경력과 영화 음악가로서의 성공 때문에, 그가 말년에 열중했던 설치음악가로서의 면모는 온전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출판편집자인 아버지와 모자 디자이너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사카모토 류이치는 열 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위음악을 접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잡지를 통해 백남준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백남준을 동경했다고 한다(“백남준은 제게 아이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후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음악학부의 동료들보다는 미술학부의 학생들과 더 친하게 어울렸던 그는 일본 모노파(物派)의 창시자인 이우환(李禹煥,1936~)*의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 무심코 반짝이는 점과 점을 이어 별자리를 그리곤 한다. 실제로 그 별들은 몇 만 광년씩 떨어져있는데도 마치 같은 평면상에 있는 것처럼 인식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하얀 캔버스에 하나의 점을 찍고, 두 번째 점을 찍으면 우리는 또 그 두 개의 점을 직선으로 이어낸다. 거기에 세 번째 점을 찍으면 이번에는 삼각형을 만들어버린다. 밤하늘의 별들을 마음대로 이어붙이는 인간의 뇌의 특성을 이성 즉 로고스라고 주를 수 있으며, 이에 대비되는 별 본래의 실상을 피시스라고 부른다. 피시스는 피직스(물리학)의 어원으로 자연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다. 1970년 전후에 일본 미술계에 등장한 이우환은 인간 뇌의 습성인 의미화를 버리고 물체 그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 소재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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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역시 소리와 소리의 관계를 치밀하게 구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별자리처럼 소리 역시 인위적으로 연결되면서 의미를 갖는 음악이 된다. 사물을 그대로 제시하는 이우환의 현대 미술처럼, 소리를 물() 그대로 제시하는 음악은 불가능할까. 사카모토 류이치는 모노파의 철학에 감명을 받았지만 그 콘셉트를 자신의 음악에 어떻게 응용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것을 시도한 것이 2017년에 발매한 async. 길거리에서 주운 돌을 두드리고 문지르거나 매미 소리가 가득한 산에서 필드 레코딩을 하기도 하는 등, 소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음악으로서의 모노파를 시도한 것이다.

 

async를 완성하고 난 그는 이런 고백을 한다. “저는 늘 제 마음이 가는대로 앨범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아티스트로서의 통일감이 없다는 것이 저의 작은 콤플렉스였습니다. 한 마디로, 시그니처가 없죠. 브라이언 이노 같은 사람은 어떤 앨범을 들어도 확고한 시그니처를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데 async를 만들었을 때는 시그니처를 확립했다는 것과는 다소 다른 뉘앙스일지는 몰라도 여기에서 얻은 것만큼은 절대 잃고 싶지 않아, 다음에는 이 성취의 연장선에 있는 더 높은 산으로 향할 거야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어릴적부터 존경해온 설치 미술가 이우환.jpg

사카모토 류이치가 어릴적부터 존경해온 설치 미술가 이우환

 

 

사카모토 류이치는 async를 공개하고 나서 이 앨범의 성과와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몰두했다. CD 같은 물건은 어디까지나 입체적인 음악을 2차원의 미디어에 정착시키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async본연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3차원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 그는 음악공연장보다 미술관에서 더 시간을 보냈고, 미술 관계자들과 함께 자신의 설치음악(음악 퍼포먼스)을 들려주는 일에 주력했다.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을 만난 것이 18살 무렵이었으니, 어쩌면 그때부터 모노로서의 음악의 길을 향해 곧바로 걸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젊은 시절의 제가 돈과 여자에게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상상에 맡기겠지만, 그렇다고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환갑을 넘기고, 큰 병을 앓고, 속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청빈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올라야 할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겠죠. 말하자면, 큰 나선을 그리듯 빙 돌아 원점을 돌아온 셈입니다.”

신체조건이나 능력만을 따졌을 때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허약한데다가. 자연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의미에 매달린다. 나의 허약함과 무력함에 의미를 붙일 수 있다면 허약도 무력도 웬만큼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종교는 이런 의미화가 극대화 된 것이다. 나는 죽지만, 그 죽음에 의미가 있다면, 죽음의 공포나 무의미를 극복할 수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종교가 아닌 예술로서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의미 또는 반의미를 탐구했다. 음악만큼 선조적(시간 따위의 흐름에 따라 체계적,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인 예술은 없다. 그가 말년에 시도한 설치음악은 음악의 법칙인 선조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런 방법으로 시작점과 종착점을 가진 절대 시간에 구속된 인간의 조건(운명)을 거부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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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李禹煥, 1936~) 은 대한민국의 조각가, 화가이다. 대학시절 일본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미술가. 일본의 획기적 미술 운동인 모노파의 창시자이며,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설치 미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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