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 에릭 사티] - 에릭 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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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 에릭 사티]
Erik Satie 저/박윤신 역 | 미행 | 2022년 08월 25일 | 원제 : Memoires d’un amneique | 168P
클래식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다. 그리고 연주회장에서는 정숙과 금언이 기본이다. 그런데 에릭 사티(Erik Satie,1866~1925)는 연주회장이 너무 조용하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청중들에게 조용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널리 알려진 일화에 따르면, 그가 1920년 파리의 화랑에서 <가구음악(Musique d'ameublement)〉을 초연할 때, 사티는 장내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계속하십시오! 막 돌아다니세요”라고 소리쳤고, 심지어는 “음악을 듣지 말란 말이에요!”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에릭 사티는 센 강과 도버해협이 만나는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옹플뢰르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 덕분에 그는 프랑스식 철자 Éric이 아닌 스칸디나비아식 철자 Erik을 쓰게 되었다(태어날 때부터가 쓴 게 아니라, 국립음악학교 콩세르바투아르에 입학해서 첫 번째 곡 <알레그로>를 작곡한 시기부터 이름 끝 철자를 c에서 k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에릭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파리로 사업을 하러 떠나면서 아들을 조부모에게 맡겼다. 이때 에릭은 조부모보다 함께 살던 숙부를 많이 따랐는데, 그의 비인습적이고 별난 기행은 숙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 살이나 되어서였지만, 그보다 더 일찍부터 음악에 끌렸다고 한다.
사티는 열두 살 때 파리로 가서 새로 결혼한 아버지와 합류했고, 1년 후부터는 콩세르바투아르에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주고 싶어 했지만 사티는 콩세르바투아르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과 규칙만 따지는 그곳의 음악 교습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업에 충실하지 않았기에 두각을 나타내기는커녕 재능이 없는 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1886년, 사티는 7년 동안 질질 끌던 학창 시절을 마치고(퇴학이었다고도 한다) <사라방드>ㆍ<짐노페디>ㆍ<그노시엔> 등의 피아노 소품을 발표했다. 그의 스타일은 당대의 음악팬들에게 조롱을 샀다. H.H. 슈트켄슈미트의『현대음악의 창조자들』(삼성미술문화재단,1976)에 그 이유가 나온다. “완전히 표현성이 없는 음악, ‘로맨틱’과 ‘다이내믹’한 고양이 완전히 결여된 음악이었다.” 그 당시 파리의 많은 음악팬들은 바그너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반(反)바그네리언을 표방한 사티의 음악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게 들렸다.
교문을 나온 사티는 1888년부터 1889년 사이에 몽마르트르의 유흥가에 있는 카바레 ‘샤 누아르’에서 피아노를 쳤다. 화가 로돌프 살리와 동업자인 시인 에밀 구도가 1881년에 문을 연 이 카바레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아방가르드 사령부’ 같은 곳이었다(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도 단골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온 사티는 홀가분한 상태에서 편하고 가벼운 형태의 오락 음악에 몰두하게 된다. 생계의 방편이기도 했던 이 일은 로돌프 살리와 다투고 난 뒤, 근처의 경쟁 업소인 ‘오베르주 뒤 클루’로 옮긴 후로도 평생 지속됐다.
1891년 ‘오베르주 뒤 클루’에서 사티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가 처음 만났다. 드뷔시는 스물두 살 때인 1884년, 프랑스 예술원이 주관하는 로마대상(Grand Prix de Rome) 작곡부문에 입상한 기대주였다. 두 사람은 19세기 초에 확립된 유럽의 고전 음악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악을 찾고 있었고 서로의 작업에 끌렸다. 정도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사티가 드뷔시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먼저 슈트켄슈미트의 말이다. “드뷔시는 이미 매우 유명하기도 했고, 네 살 위인 로마대상 수상자였지만, 사티의 영향 밑에서 결정적으로 바그너 미학을 탈피했다.”
다음은 메리 매콜리프의『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 모네와 마네, 졸라, 에펠, 드뷔시와 친구들 1871~1900』(현암사,2020)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드뷔시와 사티의 후배였던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1875~1937)은 사티가 “드뷔시와 나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회고하면서, 실로 “사티가 이정표였다”라고 덧붙였다.
위의 책에 따르면 사티는 드뷔시에게 “프랑스인이 바그너풍의 모험으로부터 해방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음악을 가져야만 한다. - 가능하다면 자우어크라우트 없이.”라고 말했다.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는 김치와 같은 양배추 절임으로 독일인의 식탁에 늘 오르는 기본 음식이다. 그러나 사티가 바그너에 반대한 것은 프랑스 대 독일이라는 민족 간의 경쟁의식에서가 아니었다. 숭고미를 강요하는 바그너 음악에서 현대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가구음악(Furniture Music)이라는 일반 명사를 얻게 될 그의 음악은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뉴에이지(New Age) 음악을 미리 들려준 것으로 평가된다. 사티의 영향력은 프랑스 6인조(조르주 오리크ㆍ루이 뒤레ㆍ아르튀르 오네게르ㆍ다리우스 미요ㆍ프랑시스 풀랑크ㆍ제르맨 타유페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는데, 메리 매콜리프는 그가 젊은 작곡가들의 선구자이자 지도자로 추앙받게 된 비밀을 카바레에서 익힌 “길거리 음악에 대한 개방성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 정당에 입당한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 신비주의 단체인 장미십자단의 성가대장이었던 사티의 삶은 그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금욕적이었다. 그의 이사짐은 손수레 하나에 실을 만큼 간소했고 평생 동안 그대로를 유지했다. 책과 독서 그리고 서점을 좋아했던 사티는 글쓰기도 좋아했다.『사티 에릭 사티』(미행,2022)는 그가 쓴 다양한 글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예술에는 진리, 즉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해왔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내각, 상원, 법정, 그리고 한 기관으로부터 나에게 강요된 진리는 나를 도발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한다.” 예술마저 내각ㆍ상원ㆍ법정처럼 진리 노릇을 하려 들면 세상은 얼마나 숨이 막힐 것인가. 사티가 자신의 음악을 집안의 가구처럼 심상(尋常)하게 여기라고 말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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