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팽을 즐기다 : 쇼팽을 사랑한 소설가의 어느 창작 노트로부터] - 히라노 게이치로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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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즐기다 쇼팽을 사랑한 소설가의 어느 창작노트로부터
히라노 게이치로 저/조영일 역 | arte | 2017년 06월 13일 | 원서 : ショパンを嗜む | 180P
히라노 게이치로의『쇼팽을 즐기다』(아르태,2017)는 프레데릭 쇼팽의 평전이라기보다는 지은이가 쇼팽을 모델 삼아 썼던 예술가 소설『장송』(문학동네,2005)의 부록이거나 취재 노트에 더 가깝다. 히라노가 상하권을 합하여 무려 1,600페이지나 되는『장송』을 발표한 것은 2005년인데, 이 소설을 쓰기 위한 메모였던 취재 노트를 출간한 것은 소설이 나오고 난 11년 뒤인 2013년이다. 그 사이인 2010년은 쇼팽 탄생 200주년이 되던 해였는데, 아마도 그것이 묵은 취재 노트를 출간하도록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849년도에 찍은 쇼팽의 실제 사진. 현재 남겨진 그의 유일한 실제 사진이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터잡은 로렌공국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귀속관계가 복잡한 장소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어 근대 이전에는 양국 모두에 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니콜라가 태어났을 때 로렌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공화국(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국가) 소유였다. 니콜라는 농가의 자식이었지만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로렌공국의 폴란드인 관리자 아래서 회계를 담당했다. 그런 그는 자신의 상관이 폴란드로 돌아갈 때 그를 따라 바르샤바로 가게 된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로 하는 사람들은 평균인보다 진취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 니콜라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니콜라는 이름을 폴란드어 미코와이로 바꾸었는데, 로렌을 떠난 그와 부모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미코와이가 이주한 지 7년째인 1793년, 폴란드의 땅 절반이 프로이센과 러시아로 분할되었다. 미코와이는 국민방위대의 일원으로 러시아군과 싸웠다. 대 러시아 항전이 패배로 끝나자 그는 프로이센령이 된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귀족의 자제를 상대로 프랑스어 교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스카르베크 백작의 집에 입주가정교사로 고용된 그는 같은 가문의 친척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백작 집안의 가사를 돌보던 테클라 유스티나 크셰자노프스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미코와이와 유스티나는 음악이 공통된 취미였다. 미코와이는 바이올린이나 플루트를, 유스티나는 피아노를 자주 쳤다. 1806년 결혼을 한 두 사람은 첫 딸 루드비카를 얻은 다음, 1810년에 프레데릭을 낳았다. 이후 둘째 딸 이사벨라와 막내 에밀리아를 낳았다. 작곡가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흥미로운 주제인데 쇼팽의 경우 남자형제 없이 양친과 누나ㆍ여동생들로만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랐다는 게 납득이 간다. “그의 음악을 들어도 여성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그것도 매우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음 분명한데 모차르트나 베토벤, 또는 동시대의 슈만 등과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쇼팽은 여섯 살 때 첫 음악선생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전에는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다. “그의 음악이 많은 파리여성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제일 처음 흥미를 가진 피아노 음색이 어머니의 연주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의 안에는 한없이 그리운 그 음의 기억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쇼팽의 악곡이나 연주에는 ‘여성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성향이 곳곳에 엿보인다.”
한때 쇼핑의 연인이었던 작가 조르주 상드. 1864년
어린 쇼팽은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여러 살롱에 초대되었고, ‘모차르트의 재래(再來)’라는 찬사와 기대를 모았다. 또 일곱 살 때에 최초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그러나 미코와이는 개성이 강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아버지처럼 하루라도 빨리 자식의 성공을 보고 싶어 매정하게 자식을 닦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음악가 쇼팽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극적이고 장렬한 일화를 찾기 힘들다. 음악가 쇼팽은 부모와 온 가족이 그의 재능을 애정의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무르익었다. 당시 유럽에는 음악의 두 수도(빈ㆍ파리)가 있었는데, 음악 천재들이 십대 전후에 도전하게 되는 두 도시에서의 연주회를 쇼팽이 뒤늦은 열아홉 살 때 하게 된 것도 이런 예외적인 특성 때문이다.
1829년 빈에서 첫 연주회를 한 이후로 빈에 활동했던 쇼팽은 1831년 파리로 거점을 옮긴 후 화려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때부터 1848년까지가 쇼팽의 황금기인데, 그의 황금기는 조르주 상드와의 함께 지냈던 1836년부터 1847년을 포함한다. 두 사람이 처음만난 때는 기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1838년부터 공인된 연인이 된 것은 확실하다. 쇼팽은 상드보다 여섯 살 연하였는데, 우연하게도 상드가 쇼팽을 만나기 직전인 1833년 6월부터 1835년 3월까지 열애를 했던 알프레드 드 뮈세도 여섯 살 연하였다.
많은 남성 작가와 염문을 뿌렸던 상드가 쇼팽을 만났을 때, 그녀는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유부녀였다. 이처럼 떳떳치 못한 신상 때문에 그녀는 요부 (妖婦ㆍvamp) 이상의 악평을 듣는다. 샤를 보들레르가『벌거벗은 내 마음』(문학과지성사,2001)에 쓴 “어떤 사내들이 이런 변소에 반할 수 있는지, 그것은 이 세기의 사내들이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이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때든 지금이든 성적ㆍ경제적으로 자립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영역인 창작에 도전하는 여성은 모두 남성들로부터 저런 ‘빻은(비윤리적)’ 소리를 들었다. 히라노도 다르지 않아서『장송』에서는 상드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는데, 다만 이 책에서는 상드가 “연하의 병약할 뿐 아니라 예민한 성격인 쇼팽에게 모성적 헌신을 한 측면”이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프랑스인들은 마주르카를 알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쇼팽이 폴로네즈(polonaise: 폴란드 전통의 가곡이나 무용)와 마주르카(mazurka: 3박자의 쾌활한 폴란드 국민무용곡)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신을 완전한 폴란드인으로 믿었던 그는 “프랑스인이라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혼혈이라는 의식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프랑스 이주 이후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의 평생 동안의 관심사 역시 폴란드의 독립이었다. 한국에서 부르는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은 프랑스어로 발음한 것으로, 폴란드어로는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팽’이다. 이제 그의 본래 이름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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