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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첫 등단한 이후 40년 이상 시와 소설을 두루 써오고 있는 장정일 작가가 음악 이야기가 담긴 종류의 여러장르 책들을 직접 읽고서 쓴 서평, 리뷰 혹은 에세이

Johnk

[루이 암스트롱 ; 흑인·연예인·예술가·천재] - 게리 기딘스

  • Johnk
  • 조회 수 576

 

책 표지.jpg

 

 

루이 암스트롱

흑인·연예인·예술가·천재

게리 기딘스 지음 | 황덕호 옮김 | 포노(PHONO) | 20210315일 출간 | 328P

 

 1940년대 비밥 운동이 시작되면서 뉴올리언즈라는 기원에 직접 닿아 있던 핫재즈, 곧 스윙재즈의 열기는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그러나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고 대중적 인기는 도리어 꾸준히 치솟았다. 방송국과 연예 산업은 1950년대에도 여전히 그를 원했고 미 국무성을 암스트롱을 미국의 문화 선전 대사로 삼았다. 암스트롱의 대중적 인기는 그처럼 높았으나 젊고 열광적인 재즈 팬과 많은 평론가들은 더 이상 그의 공연에 참석하거나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암스트롱이 1950~60년대에 쌓았던 대중적 명성은 그의 1920~30년 사이에 성취했던 음악적 명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 시절의 젊은 재즈 음악인들은 연예인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얼마나 힙하고 쿨해 보이는가가 목표였다. 이를테면 마일스 데이비스는 청중들에게 등을 보이며 연주함으로써 매너가 아니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암스트롱은 이런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1964년 암스트롱이 <Hello, Dolly>로 비틀즈의 <She Loves You>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자리에서 밀어냈을 때, 재즈계는 애증이 교차했다. 이것은 재즈 음악인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를 제외한다면 록 이전 시대의 음악인이 정상을 차지한 마지막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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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초간 되고 2001년 개정판이 나온루이 암스트롱: 흑인연예인예술가천재(포노,2021)에서 지은이 게리 기딘스는 근 40년 동안이나 암스트롱은 재즈 비평가들과 재즈 순수주의자들에게 멸시 당했다고 말한다. 그는 팝 넘버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스윙 밴드에 반주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대중 스타들과 출현한다는 이유로, 스탠더드가 된 레퍼토리를 고수한다는 이유로, 유랑극단의 스타일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너저분한 농담을 한다는 이유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는 이유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로 비난을 들었다.” 게리 기든스의 암스트롱 전기는 이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뉴올리언스의 제인 앨리는 폭력과 악행으로 신음하는 구역이었으며 공공연히 전쟁터라고 불렸다. 암스트롱의 아버지는 루이가 태어나자 가족을 이곳에 버려두고 혼자 떠났다. 어머니는 루이가 다섯 살 때까지 매춘부로 일했으며 이후에는 세탁부로 일하면서 새 남편을 맞았다. 크리올(creole: 스페인 혹은 프랑스계 사람과 아프리카계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의 본거지인 뉴올리언스에서 암스트롱과 같은 흑흑인Black Blacks’은 크리올보다 더 낮은 최하위 계층이었다. “모두가 흑흑인들을 괴롭혔다. 심지어 흑인들도 그랬다.”

암스트롱은 일곱 살 때부터 고물과 석탄을 팔았고 팁을 받고 묘지를 청소하거나 훔친 신문과 버린 음식을 팔아 푼돈을 벌었다. 그 시절,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카르노프스키 일가가 암스트롱 가족의 이웃이 되었다. 이 선량한 유대인 가족은 굶주리는 암스트롱 가족을 도와줬고 카르노프스키 부인은 루이에게 러시아 자장가를 가르쳐 주었다. 암스트롱은 1969년의 회고록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나에게 심어 준 것은 유대인 가족이라고 말했다. 음악이 흔전만전이었던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의 회고라기에는 믿기 힘든 고백이다.

 

 

3 1923년 킹 올리버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밴드에 몸담고 있던 젊은 시절의 루이 암스트롱. 트럼펫을 손에 들고 앉아있는 사람이 킹 올리버이며 루이 암스트롱은 위 왼쪽에서 네번째에 위치해있다.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여성이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릴리 하딘..jpg

1923년 킹 올리버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밴드에 몸담고 있던 젊은 시절의 루이 암스트롱. 트럼펫을 손에 들고 앉아있는 사람이 킹 올리버이며 루이 암스트롱은 위 왼쪽에서 네번째에 위치해있다.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여성이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릴리 하딘. 

 

 열한 살 때 루이는 친구들과 양철판과 하모니카 등으로 연주하는 사중창단 노래하는 바보들Singing Fools’을 만들어 돈벌이에 나섰다. 친구들은 그가 양철 나팔로 들려주는 연주를 좋아했다. 같은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내 영혼에 음악이 들어왔다.”고 한다. 1912년 루이는 선술집 밖으로 나와 관중을 불러 모으는 악사들의 음악에 홀려 학교를 중퇴했다. 그 악사들 가운데 조 올리버는 루이의 영웅이었다. 그러던 중 루이가 소년원에 가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191311일 새벽, 친구들과 함께 새해를 기념하러 나왔다가 급박한 사태에 휘말려 양아버지의 38구경 리볼버를 공중으로 발사한 것이다. 루이는 늘 코넷을 익히고 싶어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원에 코넷을 배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때, 암스트롱은 고작 열일곱 나이 많은 음악인들이 경탄하는 코넷 연주자가 되었다. 1918년 종전이 되자 뉴올리언스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몇 년 후 당대 최고의 악단을 거느리고 있던 플레처 핸더슨의 요청을 받고 뉴욕으로 가게 된다. 암스트롱이 뉴욕에 도착했던 1921년은 재즈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뉴올리언스 지역의 정통 음악이었던 딕시랜드가 새로운 재즈로 탈바꿈을 시작하던 때였다. 암스트롱은 딕시랜드의 두 박자(two beat) 리듬을 폐기하고 네 박자(four beat) 리듬의 스윙을 도입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스윙 밴드에 솔로와 즉흥을 도입했다. 스캣싱잉(scat-singing)의 경우 아프리카계 구음 음악의 전통에 그 기원이 있을 테지만, 1926년 암스트롱이 그의 악단 핫파이브와 함께 <히비 지비스Heebie Jeebies를 취입하다가 가사를 기억할 수 없어 다급하게 구사한 것이 스캣싱잉의 시작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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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리 기딘스는 암스트롱을 미국의 바흐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프리 C. 워드와 함께 쓴재즈 선언(포노,2018)에서 윈턴 마살리스는 미처 암스트롱의 진가를 발견하기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그를 트럼펫을 든 엉클 톰Uncle Tom’으로 무시했었다고 고백한다. 엉클 톰은 백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흑인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용어이며, 이와 유사한 용어로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 19세기말 20세기 초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을 희화화했던 악극)에서 멍청한 역할을 하는 흑인을 가리키는 올드 댄 터커Ol’ Dan Tucker가 있다. 암스트롱은 민스트럴 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jazzjass로 불릴 때부터 많은 악단의 연주자들은 관악기를 빙글빙글 돌리거나 연주를 하면서 리듬에 맞추어 스텝을 밟았다. 그리고 악단을 연주하는 지휘자들의 쇼맨십도 대단했다. 초창기는 물론이고 스윙 시대까지 의외로 꽤 오랫동안 재즈 음악인은 연예인이었다. 민스트럴풍의 유머 전통을 즐겼던 암스트롱에게 익살은 흑인 공동체의 흥을 돋구는 한편 백인의 인종차별에 대한 반어적인 풍자였다(비록 정교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은 돈 밖에 모른다라고 멸시할 때, 유대인들이 , 그러면 우리가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당신들을 지배해 드리지요라고 응대했듯이, 암스트롱의 광대 짓에는 그런 반어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40년대 말에 이르러 흑인 대중과 젊은 재즈 음악인들은 암스트롱의 그런 무대 매너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암스트롱을 향해 연예인과 예술인 가운데 양자택일 할 것을 요구했다. 암스트롱은 그런 마니교도적인 요구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연예인이자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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