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펄스 레이블 60주년 (Impulse 60th Anniversary) - 위대한 역사 일궈낸 프로듀서와 뮤지션의 교감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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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펄스 레이블 2대 프로듀서인 밥 실과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레이블 설립 60주년 기념 칼럼
Impulse! 60th Anniversary
위대한 역사 일궈낸 프로듀서와 뮤지션의 교감
1960년 처음 설립되어 이후 10여 년간 재즈가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던 때에, 그에 걸맞게 아주 과감하고 진취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던 재즈 레이블, 상당히 실험적이고 비대중적인 음악적 성향을 드러내왔음에도 기대를 훌쩍 넘어서는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러면서도 블루노트 같은 소규모 독립 레이블이 아니라 메이저 자본이 투입되어 운영되었던 이례적인 형태의 재즈 레이블. 바로 주황색과 검정에 흰색 바탕으로 채색된 느낌표 마크 도안으로 재즈 팬들에겐 아주 잘 알려진 임펄스 레이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존 콜트레인의 60년대 클래식 쿼텟과 이후 그의 작품들을 발매하면서 거둔 음악적, 상업적 대성공으로 인해 'The House That Trane Built' 라는 문구로 대변되기도 하는 이 레이블이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2년 전 설립 80주년을 맞이했던 블루노트만큼 긴 시간은 아니지만 현 재즈계에 존속하고 있는 레이블들 중 60년 동안 그 명맥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경우는 불과 한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안됩니다. 거기에 재즈사에 기록될 숱한 명작들이 여러 장르별로 고르게 포진해 있으며 알려진 것처럼 존 콜트레인의 비중이 아주 크다고는 하지만 실제 레코딩된 아티스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깜짝 놀랄만큼 다채로운 걸 알 수 있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이후부터는 지속적인 카탈로그의 축적이 이뤄지지 않았고 모회사인 ABC 파라마운트의 매각으로 인해 레이블의 운영권이 몇 차례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실 때문에 60년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만 빛을 발했던 한때의 레이블로 평가되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설립초기 급격한 성장세로 당시 굴지의 재즈 레이블로 빨리 성장했음에도 왜 그걸 유지하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렸던 걸까?
이례적인 재즈 레이블의 성공사례이자 동시에 실패사례로 언급할만한 레이블이 바로 임펄스이죠. 이 레이블의 명과 암을 설립 60주년을 맞이해서 살펴보고 그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지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볼 까 합니다. 글/편집부 사진/유니버설
재즈의 시대, 레이블의 첫 시작
앞서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임펄스 레이블은 전문 재즈 음반사 중에서 이례적으로 메이저 회사의 자본이 투입되어 만든 케이스입니다. 현재 거의 모든 재즈 레이블들이 마이너, 혹은 소규모 독립회사로 운영되어오고 있는 걸 감안한다면 아주 낯선 형태인데 임펄스는 첫 시작부터 ABC 파라마운트 음반사의 자본에 의해 설립되었죠. (전미를 커버하는 ABC TV 방송국과 헐리웃의 대표적인 메이저 영화제작사중 하나인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공동출자해서 만든 회사가 바로 이 음반사입니다. ABC 파라마운트 음반사는 195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재즈 외에 블루스, 소울, R&B, 록, 포크등 모든 미국의 대중음악들을 카탈로그로 두고 있는 당시 거대한 음반사였습니다). 이런 회사에서 그다지 돈이 될 거 같지 않은 재즈앨범 제작에 뛰어든 겁니다. 분명 이상한 행보처럼 보이죠.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상업적 전략이 철저한 회사에서 아무런 명분 없이 재즈에 덤벼들 이유가 없습니다. 뭐가 되었건 나름의 타당한 이유와 계산이 다 있어서 하게 된 거란 얘기죠. 그래서 왜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1950년대 후반 재즈 신과 시장의 동향에 관해서도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즈의 상업적, 대중적 성과가 가장 높았던 시기를 1920년 스윙시대, 그리고 ‘70년 퓨전시대로 이야기합니다. 그 외 다른 시기들은 별로 회자되지 않죠. 그런데 의외로 많이 간과되어온 부분인데,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대략 10여년 정도의 시기도 재즈사에서 상당한 대중적 파급력을 지녔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Jazz Age가 바로 그때라고 말하는 평론가, 역사가들도 존재하죠. 이 말이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 않는 몇 가지 근거가 있어요. 그 당시 메이저 레이블이었던 콜럼비아, 애틀랜틱, 캐피틀, RCA 같은 회사들은 이례적으로 다수의 재즈 뮤지션들과 계약을 맺고 재즈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서로 유망한 재즈 뮤지션들과 계약을 맺으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일스 데이비스, 데이브 브루벡, 존 콜트레인, 오넷 콜맨 등 그들이 계약한 뮤지션들의 종류및 숫자가 이전시기보다 이례적으로 많았으며 연간 수십 타이틀이 발매되었죠.
1959년 당시 빌보드지와 다운비트 매거진에 소개된 기사들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재즈는 현재 큰 비즈니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주제가로 재즈 연주곡들이 빈번하게 쓰이고 그 곡이 담긴 앨범들은 팝 음반에 못지않게 팔려나간다. 재즈가 오고 있다.”
당시 초대형 메이저 레이블이었던 ABC 파라마운트에서 별도의 자금을 출자해 재즈 레이블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도 당시 재즈 시장이 예상을 훌쩍 넘어 놀랄 정도로 커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단순히 음악적인 목적의식이나 예술성을 강조하기 위해 임펄스 레이블을 설립한 게 전혀 아닌 겁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당시 콜럼비아와 애틀랜틱에서 자신들보다 더 우월한 음반 판매고를 지난 수년간 보여준 것에 대해 내부적으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레이 찰스 같은 뮤지션도 거금을 들여 애틀랜틱에서 빼내와 계약을 했던 것이죠. 그런 일환으로 새로 만든 재즈 레이블 프로듀서로 당시 젊고 이제 막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던 젊은 크리드 테일러를 과감하게 앉힌 것입니다.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와 트럼페터 프레디 허바드
재즈 팬들에게 버브와 CTI 레이블의 대표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크리드 테일러는 당시 독립 레이블이었던 베들레헴 음반사에서 A&R 파트 담당자및 프로듀서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멜 토메를 비롯한 몇 장의 앨범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죠. 그래서 ABC 파라마운트에서 그와 인터뷰를 갖고 난 뒤 레이블 총 책임자로 그를 선임하였고 놀랍게도 그가 맡고 난 이후부터 바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의 핵심 업무는 가능성 높은 재즈 아티스트들을 섭외해 앨범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당시 그가 만든 몇 장의 재즈 앨범이 준수한 결과를 내기 시작하자 아예 산하 별도 레이블을 만들고 거기 총책임자로 크리드 테일러를 앉힌 것이죠.
그는 애초 트럼펫을 불었던 뮤지션이었으며 음악적인 감각도 뛰어난데다 특히 대중적인 기획 아이디어가 좋은 걸로 평판이 높았는데, 임펄스 레이블을 맡은 이후 곧바로 레이 찰스의 소울 재즈 앨범 <Genius + Soul> = Jazz , 길 에번스의 명작 <Out of the Cool> 트럼본 레전드 카이 윈딩 <The Great Kai & J.J> , 그리고 올리버 넬슨의 앨범<The Blues & the Abstract Truth>을 제작, 잇따라 히트 시키며 단숨에 임펄스 레이블의 주가를 올려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즈 앨범의 판매고는 타이틀당 10,000장 정도면 꽤 성공적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크리드 테일러는 레이 찰스의 작품을 발매 후 불과 두 달여만에 15만장이상 세일즈를 기록했고 그 외 작품들도 모두 1~2만장 정도 기록함으로서 단숨에 자신의 입지를 끌어올렸죠. 레이블 설립 1년여만이 이룬 상업적 성과가 블루노트의 수년간 전체 누적 판매고보다 더 높았다고 하니 크리드 테일러 산하의 임펄스가 얼마나 임팩트가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만 임펄스 레이블에 몸담았다가 버브 뮤직의 메인 프로듀서로 스카웃되어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기 전 아주 중요한 성과를 임펄스에 던져주고 가는데 그게 바로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과의 계약입니다. 레이 찰스와 존 콜트레인이라는 슈퍼스타를 계약서에 사인하게 만든 것만으로 사실상 임펄스의 토대를 그가 다 만들어놓고 갔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의 아티스트 섭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수완을 버브에 가서도 성공적으로 발휘해 자신의 입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영광의 시대 이끈 프로듀서 밥 실(Bob Thiele)
크리드 테일러가 이렇듯 임펄스의 초석을 다 닦아놓았다면 뒤이어 이를 내실 있게 발전시킨 인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로듀서 밥 실(Bob Thiele)입니다. 크리드 테일러의 뒤를 이어 1961년부터 메인 프로듀서를 맡은 그는, 크리드 테일러가 뿌려놓은 여러 종류의 씨앗들을 경작하는데 가장 중요한 공을 세웠는데 1961년부터 69년까지 그가 몸담았던 만 9년여동안 레이블을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게 성장시켜냈습니다. 그는 크리드 테일러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는데 상업적인 수완과 감각이 탁월했던 크리드 테일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그들의 창작력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으며, 특히나 음악 자체에 몰두하던 존 콜트레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크리드 테일러였더라면 밥 실이 한 것만큼 이뤄내지 못했을 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당시 인터뷰에서 의외로 밥 실은 자신이 임펄스 레이블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면서 작품을 만들어낼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가 처음 임펄스로 배치되어 왔을 때만 해도 재즈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빌리지 뱅가드에서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보고 난 이후 깜짝 놀랄만큼 충격을 받게 되고 그 이후부터 재즈에 점차 매료되어갔다고 하네요. 그가 기획한 멋진 앨범들 (듀크 엘링턴과의 색소폰 듀오 시리즈라던지, 찰스 밍거스, 맥스 로치, 소니 롤린스, 같은 당대 거물들의 레코딩 스케줄이 하루에 2~3개씩 잡혀 있어서 스튜디오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은 전체적으로 준수한 세일즈를 보여주었고 결정적으로 존 콜트레인의 앨범이 다소간의 손해를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아주 반응이 좋았기에 그는 뮤지션들의 창작의도에 여간해선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죠. 그러나 시대는 점차 록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고 이 흐름은 업계의 최일선에서 움직이고 있던 밥 실에게도 당연히 느껴지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는 ABC 소속으로 여러 대중 음악가들을 섭외해 앨범을 만들기도 하고 판매가 될만한 기획도 별도로 계속 해나갔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그가 바로 루이 암스트롱의 히트곡 ’What a Wonderful World‘ 의 작곡가였습니다. 그 곡이 상업적 결과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이전부터 만들어오던 전위적인 재즈 앨범들의 제작은 점차 판매가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줄여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존 콜트레인이 1967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임펄스 레이블의 위세는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콜트레인 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파로아 샌더스나 아치 솁같은 후배들을 중용해보기도 했지만 결코 콜트레인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콜트레인이 세상 떠나고 2년이 지난 1969년 밥 실도 임펄스 레이블 프로듀서 직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갑니다. 이후 그는 플라잉 더치맨이라는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며 앨범 제작자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나갔죠
앨범 러브 수프림<Love Supreme> 레코딩 세션 당시 반 겔더 스튜디오 전경, 좌로부터 매코이 타이너, 아치 솁, 존 콜트레인, 프로듀서 밥 실
이후 70년대부터 임펄스는 여러모로 입지가 크게 줄어들어 60년대처럼 적극적인 재즈 앨범 제작을 하지 못하며 어느 정도 상업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투자를 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모회사가 팝, 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상황이니 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고 결국 임펄스는 재즈 레이블이었음에도 제네시스 같은 록 아티스트의 앨범을 발매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죠. 다만 밥 실의 뒤를 이어맡은 에드 미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찰리 헤이든이나 키스 재럿, 가토 바비에리, 선 라등 당시 젊고 진취적이었던 재즈 아티스트들을 데려와 앨범을 만들면서 70년대 후반까지 간헐적으로 과거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그 이후의 임펄스 역사는 사실 60년대 걸작들의 리이슈및 미공개작품들의 발매에 한정되었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수차례 카탈로그 권리가 넘어가면서 MCA나 GRP 로고와 함께 재발매되다가 간헐적으로 마이클 브레커, 매코이 타이너, 다이내나 크롤 같은 당대 인기있는 뮤지션들의 신작을 발매하곤 했죠. 2021년 지금까지도 임펄스 레이블을 통해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만 결코 콜트레인 시대의 위상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임펄스 레이블의 카탈로그 가치가 계속적으로 유지가 되는 것도 바로 콜트레인을 비롯한 60년대 걸작들의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탓이 압도적으로 큽니다.
그러고 보면 이 정도로 특정 아티스트의 파급효과가 컸던 재즈 레이블이 재즈 역사에 있었을까 싶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역설적으로 레이블의 역사를 꾸준하게 만들지 못한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불가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와 같은 존재감을 가진 뮤지션이 재즈사 통틀어 몇 명 되지도 않을 뿐더러, 제작자의 눈에 그 정도 가치를 지닌 뮤지션이 보인다면 레이블의 존폐를 걸고서라도 사수해야 마땅하죠. 평생 한번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한 존 콜트레인이라는 희대의 뮤지션이 있었기에 임펄스 레이블은 재즈사에 이름을 제대로 각인시킬 수 있었던 거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시점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이 레이블의 지난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인식해야 할 것은 바로 프로듀서와 뮤지션의 적절한 관계와 소통이라고 봅니다.
밥 실은 아티스트에게 별도의 제재나 요구조건을 걸지 않고 가급적 각자의 아이디어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콜트레인이 어떤 시도를 하건 최소한의 의견을 나눌지언정 이래라 저래라 요구및 강요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에 콜트레인은 다수의 걸작들로 화답했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 레이블에 남았습니다. 이런 레이블 프로듀서와 아티스트의 관계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지금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합니다. 바로 ECM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와 피아니스트 키스 재넛의 관계! 별도의 계약서조차 없음에도 이들은 50년 넘게 하나의 팀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워낙 특정 아티스트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에 대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탓에 그의 타계와 함께 급격히 힘이 빠져버린 것은 레이블의 운영에서 분명 패착이긴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난 역사적인 작품들과 그 유산과 영향력에 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귀감이 됩니다. 그가 들려주었던 심오하고 난해한 음악이 어째서 수십만장의 판매고를 거둘 수 있었는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세일즈가 이뤄지는지는 5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스테리처럼 보입니다만 이러한 현상이 이뤄질 수 있게 된 상호과정만큼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프리 재즈에 관해 별 이해가 없었던 젊은 프로듀서의 눈을 뜨게 만들어준 젊은 천재 연주자와 그의 가능성을 단박에 알아채고 그에게 자유로운 창조적 공간을 마련해준 지혜롭고 영민한 프로듀서! 재즈라는 음악이 듣기에 어렵고 비대중적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위대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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