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의 여자들] - 버지니아 로이드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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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앞의 여자들 인생이라는 무대의 삶을 연주하다
버지니아 로이드 지음 | 정은지 옮김 | 앨리스 | 2019년 10월 28일 출간
“너 아직도 피아노 치니?” 버지니아 로이드가 고등학교 졸업 20주년 동창회에 갔을 때, 그녀가 받은 질문은 이것이 유일했다. 그녀는 동창생들이 원하는 요약 보고와 간결한 답변 대신『피아노 앞의 여자들』(앨리스,2019)이란 책을 썼다. “동창회는 나를 크게 동요시켰다. 내가 동창들이 기억하는 만큼 좋은 피아니스트였다면 왜 직업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을까?” 지은이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피아노와 결별하고 영문학을 택했으며, 졸업을 하고 출판 편집자가 되었다.
클래식 분야의 직업 연주자 뒤에는 하나같이 극성스러운 부모가 있고,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연주자 경력을 중도에 포기한 경우가 많다. 거기다가 부모들이 재력까지 갖추었다면 그들의 자식은 십중팔구 직업 연주자가 되는 교육을 밟게 된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양친 가운데는 음악가를 소망했던 사람이 없었고 재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날마다 동틀 때 일어나 날이 저물 때까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했던 ‘블루 칼라’였는데, 전축을 통해 늘 음악을 들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스윙 재즈 전성기의 빅밴드였다. 넬슨 리들, 토미 도시와 지미 도시 형제가 일요일 아침에 자주 우리를 위해 연주했다. 오페라풍 창법은 물에 빠진 고양이 노래에 비견될지 몰라도, 엘라 피츠제럴드의 스캣 창법은 천재성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베니 굿맨이 듀크 앨링턴을 연주하는 것은 들었어도, 모차르트 클라리넷 콘체르토를 연주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지은이가 여섯 살 때인 1976년, 아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순회공연 중인 자크 루시에 트리오의 연주회 표를 샀고, 딸은 처음으로 라이브 재즈 콘서트를 감상했다. 라디오로는 이미 들어 봤지만 그날 밤 콘서트에서 들은 바흐 연주는 신비로움 자체였다. “트리오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 넓은 무대에 겨우 세 명의 음악가들만 있다는 것은 거의 믿기 힘들 정도였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소리의 온전한 세상을 창조했다. […] 음악가들이 땀을 흘리거나 옆에 둔 물잔에 손을 뻗는 광경 또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 남자들은 나에게 마치 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땀이 나고 목마름을 느낀다는 사실은 해방적이었다. 이는 내가 자라면 그들처럼 연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클래식 작품들을 바탕으로 재즈의 스윙과 즉흥연주를 구사해 성공을 거둔 자크 루시에 트리오
버지니아의 부모는 딸이 연주회에 갔다 온 이후로 장난감 피아노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일곱 살 때 피아노를 사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피아노 전시장에 간 그녀는 스테인웨이ㆍ뵈젠도르퍼ㆍ가와이ㆍ빌스 피아노를 지나 마음에 드는 적갈색 야마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시험 삼아 뭔가 연주해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초보자용 악보집에 나오는 것 가운데 외우고 있던 멜로디를 쳐보았다. 손가락이 꼬여 음을 잘못 연주한 그녀는 “아앗! 잘못 눌렀어!”하며 그 멜로디를 다시 연주했다. 그러자 아버지 옆에 딱 들러붙어 있던 판매원이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판매원의 말을 딸의 조숙한 재능에 대한 칭찬으로 해석했고, 곧바로 그 피아노를 샀다. 노벨 판촉상이 있다면 저 판매원의 것이다.
절대 음감마저 지녔던 지은이는 초견 연주에 뛰어나다 보니 열 살 때부터 인근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수, 플루티스트들의 단골 반주자가 되었다. 그녀는 교회와 지역 사회의 행사장, 교내 연주회의 스타였고 피아노 덕분에 학교에서 “제일 쿨한 여자애들”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는 덤도 얻었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경쟁을 혐오”했던 그녀의 성격도 원인이지만, 부모에게는 딸을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다는 열망도 재력도 없었다. 일례로 그녀는 열두 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 경연 대회에 나갔는데, 그녀의 복장은 연주회 예복을 차려 입고 나온 다른 소녀들과 전혀 달랐다. 바지, 반소매 면 티셔츠, 갈색 단화. 그녀의 피아노 선생이 보기에 제자의 옷차림은 “음악 경력의 주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유는 아직 핵심에 다다르지 못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는 그보다 네 살 많은 마리아 아나 모차르트라는 누나가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아나가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아나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그녀가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아나와 모차르트는 매니저인 아버지와 함께 유럽 순회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성인 여성이 대중 앞에서 공연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1769년 12월 이탈리아 공연을 하러 떠나면서 딸을 집에 남겨 두었다. 마차가 떠나자 그녀는 흐느끼며 쓰러졌다. 이후 그녀는 두 번이나 아내와 사별하고 다섯 아이를 둔 판사와 결혼했고, 세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며 피아노 교사를 했다.
1777년 10월,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준 수제 피아노 업자 요한 슈타인을 만나기 위해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했다. 이때 슈타인은 대중공연에 익숙했던 자신의 딸 나네테에게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보라고 시켰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 “그 아이는 여덟 살이고 […] 천재성을 갖고 있죠.” 라고 썼다. 하지만 그녀 역시 모차르트의 누나처럼 직업 연주자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은 나네테는 1794년, 수제가 아닌 대량 생산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피아노 공장들 가운데 하나를 운영했다. 19세기 중반부터 피아노가 대량 생산 되면서 악보 출판이 성장하고 피아노 교사의 수효가 급증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여성들은 “음악계의 새로운 최하층 계급을 창출”했으니 그들이 바로 그 시기의 서양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개인 피아노 교사”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1750)
피아노의 대량 생산과 판매가 악보 출판을 번성시키자 “즉흥연주는 공연에서 사라지고, 표기된 음악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신봉이 이를 대체했다.” 오늘날에는 바흐를 천재적 작곡가로 알지만 18세기 전반에는 특출한 즉흥연주로 여겨졌다. 자크 루시에가 바흐의 작품들을 재즈 즉흥연주의 기초로 사용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순수하게 즉흥연주인 피아노 솔로 공연으로 명성을 쌓은 키스 재럿은 즉흥연주를 체계적으로 배제해 온 클래식계의 반대편에 있다. 지은이는 십대 시절 반주자로 활동할 때부터 즉흥연주를 좋아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재즈 밴드들 중 어디에도 여성 피아니스트는 없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레코드 수집품의 밴드들에서도 여성 피아니스트는 한 명도 없었다.”(193쪽) 서른여섯 살 때 시드니에서 뉴욕으로 이사를 한 지은이는 재즈 워크숍에 참여했고, 마침내 재즈 밴드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이 독후감은 이 책에 대한 간결한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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