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100년 악기 100년 | 색소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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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베세(Sidney Bechet), 츄 베리(Chu Berry), 베니 카터(Benny Carter),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이들의 이름은 곧 재즈이다.
색소폰 연주인들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탄생 과정을 알아보자. 색소폰이라는 악기는 재즈에서 쓰이기 이전에 고전 음악인 클래식에서 먼저 사용되어 왔으나 그다지 큰 비중을 두는 악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색소폰은 재즈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기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돌프 색소(Adolf Saxo)는 왜 색소폰을 만들었나?
색소폰을 처음 만든 아돌프 색소의 아버지는 벨기에의 디낭 출신으로 그 곳에서는 이미 관악기 제조사로 정평이 나 있는 유명한 악기 제조상이었다. 아돌프는 장인 정신이 투철한 악기상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가 어렸을 때 브뤼셀로 사업을 이전했고 그곳에서도 역시 그의 장인 정신은 많은 연주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성공적인 사업 확장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아버지가 하는 일을 곁에서 지켜봐 온 아돌프는 악기 만드는 일과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돌프 색소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악기를 배워 나갔는데 이는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직접 그 악기를 테스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배운 아돌프 색소는 자신이 배운 악기들의 다양한 특색을 알게 되었고 각각의 악기마다 고유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자신이 배운, 그리고 당시까지 나온 금관, 목관 악기의 장점만을 살려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자 했다. 아돌프 색소는 악기를 배우면서 느낀 점, 즉 목관 악기의 음색과 금관 악기의 풍부한 음량을 하나로 만들 생각을 했고 결국 ‘색소폰’이라는 악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처음 만든 색소폰은 클라리넷처럼 12음계로 복잡하지 않은 대신 배음을 이용한 옥타브 음을 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옥타브 음을 내려면 관 자체가 기존의 클라리넷보다는 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무보다 쉽고 편한 금속으로 원추형의 큰 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실험 결과를 통해 소리를 내야하는 마우스피스는 금관 악기의 것을 사용하면 소리가 너무 가냘프고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한 후 나무를 깎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베이스 색소폰이라는 결과물이 탄생되었다.
아돌프 색소가 처음으로 만든 베이스 색소폰은 1842년 베를리오즈에게 보내졌고 1844년, 관현악단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선보였다. 이후 1846년 3월 20일에 특허를 따내게 되었고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곡에 처음으로 사용된다. 이후 아돌프 색소의 심혈을 기울인 실험은 꾸준히 계속되어 베이스 색소폰보다 조금 작은 색소폰을 만들 계획을 세운 뒤 큰 원추형의 관을 조금 작게 만들고 길이 또한 줄이게 된다. 이 악기가 현재 대중들에게 청아한 소리로 사랑 받고 있는 알토 색소폰이다. 알토 색소폰은 1853년경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윌리암 프라이의 교향곡에 사용되었다. 알토보다 조금 후에 나온 테너 색소폰은 비제의 ‘아를르의 처녀’에 사용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를르의 처녀''에는 테너 색소폰 독주가 있었는데 이 연주 이후 많은 테너 색소폰 연주 지망생들이 테너 색소폰을 구입하려고 아돌프의 집으로 찾아와 그의 집 앞에 긴 줄을 서는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탄생한 색소폰은 교향곡에도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지만 소리의 울림과 화려한 사운드로 군악대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향곡과 오페라 등 고전 음악에서는 점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색소폰은 1900년대에 들어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남북 전쟁 이후 헐값에 불허 받은 악기로 연주하던 흑인 브라스 밴드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주로 댄스 밴드와 고적대에서 사용되기에 이르렀으며, 현재 우리 시대 대부분의 모든 음악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재즈에서 가장 활발히 연주되는 악기로 자리 매김 하게 된 것이다.
재즈에서 최고의 자리를 부여받은 색소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재즈에서 색소폰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 191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에는 주로 빅 밴드에서 사용되었다. 초기 뉴올리언즈 시대 최고의 연주인으로 평가받는 시드니 베세는 트럼펫이 지배하던 당시 재즈계에 화려하게 등장해 클라리넷과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를 통해 색소폰의 맛을 가장 확실히 전달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수많은 연주인들이 존경하는 알토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 이전에는 콜맨 호킨스라는 위대한 명인이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장난감 만지듯 주물렀고 팬들은 최고의 연주력을 겸비한 호킨스를 ‘색소폰의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표현했다. 1904년에 태어나 폭넓은 음역 대에 풍부한 사운드로 스윙한 호킨스는 스윙 시대부터 밥, 그리고 모던 재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색소포니스트들에게 교과서적인 인물이 되었다. 당시 빅 밴드에서의 색소폰 솔로는 콜맨 호킨스가 처음 시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한 코드 진행과 남보다 앞서 나가는 생각, 즉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던 복잡한 화음 구조를 즉흥연주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후 각각의 빅 밴드에서 색소폰 솔로이스트를 두기 시작했다.
호킨스의 긴 솔로에서의 멜로디 라인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이면서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호킨스는 1923년부터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플래처 핸더슨 밴드에서 최고의 색소폰 솔로이스트로 활동한 후 30년대로 넘어와서는 소규모 캄보를 조직해 자신의 밴드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호킨스가 연주한 ‘Body And Soul’은 최고의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색소폰이 빅 밴드에서 그 위상을 확실하게 자리 매김하며 다양한 솔로이스트들이 활동할 때 등장한 인물 가운데 최고의 알토 색소폰 주자로 등극한 베니 카터는 다소 호킨스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자신만의 연주력으로 호킨스와 대적하는 연주인이 되었다. 베니 카터는 호킨스보다 조금 깊고 풍부한 음량으로 알토 색소폰이 주는 맛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연주인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일목요연하게 연주하는 깔끔한 곡 해석력과 멜로디가 아름다운 즉흥연주를 구사했다.
특히 즉흥연주시 경쾌하고 지적인 맛을 잘 살리는 연주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호킨스가 화려한 즉흥연주와 알 수 없는 멜로디의 화음을 보여주었다면 베니 카터의 스윙은 모던 재즈 시대의 알토 주자들에게 풍부한 하모니를 통한 스윙을 연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베니 카터가 클럽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알토 색소폰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는 점이다. 트럼펫, 클라리넷은 물론 때로는 노래까지 불러 대중들을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해 함께 호흡하는 연주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베니 카터의 뛰어난 연주와 편곡 능력을 인정한 플래처 헨더슨,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 등은 자신들의 밴드를 위해 베니 카터에게 편곡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당시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베니 카터가 연주하는 ‘How Deep Is The Ocean?’ ‘This Can''t Be Love’같은 곡을 들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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