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 비틀즈 이후 홀로 써내려간 신화] - 톰 도일, [폴 매카트니] - 필립 노먼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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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비틀즈 이후 홀로 써내려간 신화
톰 도일 지음 | 김두완 , 이채령 옮김 | 안나푸르나 | 2014년 05월 26일 출간 | 356P
폴 매카트니
필립 노만 지음 | 이미경 , 홍수연 옮김 | 구민사 | 2019년 05월 24일 출간 | 864P
비틀즈에 대한 책은 한 트럭분이나 되지만, 폴 매카트니에 대한 책은 없다. 매카트니에 대한 평전으로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필립 노만의『폴 매카트니』(구민사,2019)가 있고, 그 전에 톰 도일의『폴 매카트니 – 비틀즈 이후, 홀로 써내려간 신화』(안나푸르나,2014)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쪽 사정은 어떨까? 바로 존 레논 말이다. 비틀즈 시절, 두 사람은 밴드의 주도권을 놓고 티격태격했다. 그렇다면 해체 이후, 평전의 숫자로 따지면 누가 승자일까? 단연 레논의 완승이다. 제임스 우달의『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한길사,2001)을 필두로 여러 권이 평전이 나와 있으며, 레논의 시를 모은 시집과 편지를 모은 서신집까지 나와 있는 정도다. 더욱 특별난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위인전에도 레논이 끼어 있다(세 권이나 된다!)
2013년 영국에서 출간된 도일의『폴 매카트니』는 음악전문잡지의 기자이자 작가인 지은이가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매해 한 두 차례씩 매카트니와 나누었던 인터뷰를 기반으로 집필되었다. 한국어판 부제가 자상하게 가르쳐주듯이 이 책은 ‘비틀즈 이후’의 매카트니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비틀즈 이후의 매카트니에 충실하려면 비틀즈 해체의 순간 또는 맥락을 잠시 복시해 보아야 한다. 비틀즈 이후의 매카트니는 바로 비틀즈 해체를 디딤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매카트니가 비틀즈 탈퇴를 선언하면서 비틀즈 해체가 최초로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70년 4월 10일이다. 하지만 비틀즈는 1968년부터 해체를 향해 비틀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매카트니가 공식 탈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네 명의 멤버 가운데 매카트니를 뺀 세 명의 멤버는 한 번씩 돌아가면서 탈퇴를 선언했고, 그때마다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매카트니는 가장 늦게 탈퇴 선언을 한 멤버다. 앞의 세 경우는 모두 비공식적인 집안싸움에 그치고 말았으나, 매카트니는 그것은 <데일리 미러>지와의 인터뷰 형식을 취했기에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도일은 그 서면 인터뷰의 어느 부분에도 매카트니가 실제로 비틀즈를 떠난다고 명시한 부분은 없다고 말하지만, 비틀즈의 내부는 이미 봉합이 어려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이후, 밴드의 주도권을 놓고 레논과 매카트니가 반목했다고들 하지만 실은 레논과 매카트니를 한 편으로 하고,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를 다른 편으로 하는 또 다른 전선도 격렬했다. 1969년 1월, ≪Let It Be≫앨범에 실릴 <I’ve Got A Feeling>의 기타 파트를 두고 폴과 심한 언쟁을 벌였던 조지 해리슨이 밴드를 뛰쳐나간 진짜 이유는 다름아닌 레논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1965년 당시 비틀즈 멤버들의 모습
제임스 우달도 지적하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비틀즈 해체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1969년의 매니지먼트 위기를 꼽고 있다. 도일도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를 누가 관리할 것인가를 놓고 매카트니는 훗날 자신의 장인과 처남이 될 리 이스트먼과 존 이스트먼을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이에 나머지 세 멤버는 앨런 클라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그 선두에 레논이 있었는데 레논을 비롯한 스타와 해리슨은 이스트먼 부자가 매카트니에게만 유리한 활동을 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스트먼 부자는 이에 대항하여 클라인을 사기꾼으로 깎아내렸다. 도일은 거두절미 이렇게 말한다. “비틀즈가 해체된 뒤 멤버들의 아내들이 비난받았다. 하지만 비틀즈를 분열시킨 장본인은 오노 요코나 린다 매카트니가 아닌 앨런 클라인이었다.” 과연 그럴까?!
1970년 비틀즈가 공식 해산되었을 때 매카트니는 27살이었다. 세인트 피터스 교회 홀에서 쿼리맨에서 활동 중이던 레논을 처음 만났던 15살 무렵부터 비틀즈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그는 잉여인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때까지 벌어들인 돈도 명성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했다. 정체성에 극단적인 위기가 닥쳤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비틀즈의 전 멤버가 이런 후유증과 마주했다. 그들은 비틀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한편, 각가 비틀즈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매카트니가 후유증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무명의 뮤지션들로 구성된 유랑밴드로 ‘무계획적인 투어’를 하는 것이었다. 윙스(Wings)라는 이름으로 막 첫 앨범을 냈던 이 밴드는 서커스단처럼 대형 합승차에 가족까지 실은 채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대학교가 있는 곳 아무데서나 ‘50페니’짜리 공연을 했다. 1972년에 2월에 치러진 열하루만의 공연은 비록 짧았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이 공연은 비틀즈가 1966년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지 거의 6년 만에 매카트니가 대중 앞에 선 공연이다. 매카트니는 이 공연을 통해 비틀즈가 이름을 얻기 전에 닥치는 대로 공연을 했던 초창기 시절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게릴라 공연을 통해 옛 비틀즈 멤버로서 정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제로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음악 치료’였는데, 이 공연을 계기로 윙스는 그 해 7~8월에 유럽 투어 공연을 시작하게 된다.
게릴라 공연의 가장 큰 성과는 그가 갓 결혼한 린다 매카트니를 밴드의 키보드 주자로 만든 것이다. 사진작가였던 린다는 로큰롤 스타와 사귈 줄은 알았지만 음악에는 아무런 지식도 재능도 없었다. 매카트니는 린다에게 기초적인 피아노 코드를 가르쳐 주었다. 윙스의 멤버들은 전문 키보드 연주자의 영입을 늘 아쉬워했지만, 멤버들은 린다가 매카트니에게 한 명의 키보디스트 이상의 존재임을 인정했다. 음악적으로는 영 아니었지만 린다는 요코가 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안정감을 주었다.
1971년 결성되어 1981년 해체한 윙스는 10년의 활동 시간 동안 7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냈다. 비틀즈의 화려한 업적에 가려서 그 성과가 보이지 않을 뿐, 윙스의 모든 앨범은 빌보드 앨범의 탑텐에 진입했고 그 가운데 다섯 장은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1970년대 대중 음악계에서 윙스의 존재감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매카트니가 게릴라 공연을 떠나기 전인 1971년 12월, 윙스의 이름으로 첫 앨범이 나왔으나 이들의 음악은 탄생과 함께 이미 구세대의 것이 되었다. 비틀즈가 해산한 직후인 1970년대 초반, 음악계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였으며 데이비드 보위를 위시한 글램 록(Glam Rock)이었다. 이들은 '60년대의 비틀즈와 완전히 달랐다. 그 때문에 “과거의 비틀즈와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은 안쓰러울 정도로 퇴색된 듯 보였다. 해체한 지 고작 일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비틀즈의 해체를 매니지먼트의 위기 따위에서 찾는 해석을 물리쳐야 할 이유다. 비틀즈는 그들의 음악적 임무가 끝났다는 것을 잘 간파했기에 해체를 결단한 것이다.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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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 탈퇴이후 폴 매카트니가 결성한 그룹 윙스. 옆에 앉아있는 여성이 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린다 매카트니이다..jpg (File Size: 334.2KB/Download: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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