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 양성원, 김민형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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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수학을 사랑한 첼리스트와 클래식을 사랑한 수학자의 협연
양성원, 김민형 저 | 김영사 | 2024년 06월 20일 | 256P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김영사.2024)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양성원과 전 옥스퍼드 수학과 교수였던 수학자 김민형이 음악을 주제로 나눈 대담집이다. 한국 출신의 이름난 서양 고전 음악 연주자들이 책을 내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이 아님에도, 이 대담집은 특별나다.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면 저마다 자전적인 에세이를 출간하는 마당에, 1967년생인 양성원이 음악 활동이 아닌 활자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양성원은 “저는 백 퍼센트 엘리트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엘리트주의란 무엇보다도 “연주자 자신이 가장 훌륭한 것을 추구해서 그 경지”에 이른 다음, 자신이 도달한 “최고의 음악”을 음악팬 앞에 내놓는 것이다. 이런 예술가적 엘리트주의는 권력을 무진장 추구하거나 대중 위에 군림하려는 선민의식과 구별된다.
나를 연마하고 난 뒤에,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 주겠다는 양성원의 엘리티즘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또 이런 좋은 엘리티즘을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한 일등주의와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하나밖에 없는 일등을 차지하기 위해 각자를 연마한다면 세상은 만인이 만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터일 뿐이다.
“그러니까 저에게 첼로 연주는 단순한 음악적 여정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첼리스트로서 저는 평범한 일상을 초월하여 더 위대한 것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시대, 다른 이상과도 공명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저의 진정한 자아를 탐색하게 됩니다. 저는 첼로를 통해, 음악을 우리 모두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조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꿈꿉니다. 음악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말이죠.” 엘리트가 된다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위대성을 발견하는 것이자 사람들과 함께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고민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엘리트주의자라고 했지만, 엘리트주의만큼 한국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없다. 그래서 음악인인 그에게 좀 더 마땅한 용어를 찾아보니, 양성원에게는 ‘라이브주의자’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한 음원 듣기가 일반화된 오늘날, 공연장이냐, 녹음된 음악(레코드ㆍCD)이냐 하는 논쟁은 진기하고 호사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양성원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물론 레코드나 CD 같은 녹음물로는 음악을 경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곡을 여러 사람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라이브로 들을 때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들으면 ‘침묵’이라는 배경이 있어서 더욱 집중해서 들을 수 있어요. 그 침묵이 청각을 깨워요. 100명, 200명이 한자리에 모인 조용한 순간, 나의 귀가 음악을 경청할 준비를 하는 거죠. 레코딩 연주로 아무리 여러 번 들었던 음악이라도 라이브의 순간에는 파동이 다릅니다. 자신의 청각이 얼마나 곤두서는지 본인도 몰라요. 모두가 조용한 순간, 오로지 청각에만 집중하는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감상이라는 면에서, 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침묵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감각이 어떻게 곤두서는지, 그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고전 음악 공연장에서는 청중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청중들 서로가 서로에게 침묵을 선사한다. 그러다가 생겨난 기침소리는 본인을 얼마나 당황스럽게 하는가? 우리는 기침을 참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하고 만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연민한다. 음악을 듣기 위한 침묵을 침해함으로써 제일 먼저 손해를 본 사람은 본인이기 때문에! 반면, 집안에서 혼자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 필수적인 침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완벽한 음악실을 준비하거나 헤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일상 속의 소음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 사실 침묵만 아니라, 집안에서 홀로 음악 듣기는 순수하게 음악만을 위해 바쳐진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오디오를 켜놓거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받으며 잡지를 보거나 음식을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양성원은 음악 듣기를 무척 긴 시간 동안 정성 들인 “리추얼”이라고 생각한다. “감상을 둘러싼 많은 요소와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일단 선택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곡을, 그 아티스트의 연주를 듣겠다는 선택을 하기까지 여러 요소가 작용하겠지요. 그리고 그 곡을 듣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홀을 찾아가서 여러 사람과 함께 자리에 앉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실제로 그 곡이 연주되는 순간 청자는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듣기 위한 준비 과정이죠. 기다리고 찾아가고 하는 일 모두 감동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녹음 기술과 인터넷이 발명되는 과정에서 현대인은 음악 감상에 필요한 의례를 점차 간소화해왔다. LP(레코드)시절만 해도 경건히 판을 닦고 신중하게 바늘을 올려놓는 과정이 있었지만, CD는 그 과정을 축소했고,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예 음악을 듣기 위한 의례 자체를 삭제했다.
인터넷 기술 때문에 생겨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단절 혹은 대립은 음악 세계에서만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다. 인터넷의 발달은 한병철의 책 제목이기도 한 ‘리추얼의 종말’을 더욱 빠르고 넓게 퍼트리고 있다. 양성원과 대담을 한 김민형은 학문 분야에서도 강의와 세미나에서 대면 활동을 지키려는 쪽과 인터넷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쪽이 있다면서, 굳이 공동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학문 활동에서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서 대화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사와 학생의 대면 없는 유비쿼터스 러닝(Ubiquitous Learning)은 교육이 교사와 학생 사이의 전인적인 의례를 동반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한다.
고전 음악계에서 연주자의 자율성(표현) 문제는 재즈만큼 답이 확실치 않다. 양성원은 “연주회에 참석하는 게 어떤 작곡가의 곡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혹은 특정 연주자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일까요?”라고 물으면서, “바흐를 연주할 때는 연주자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오직 바흐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베토벤이 이 곡을 쓰던 감정을 보여주어야 하고 연주자 양성원은 없어져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런 연주 원칙은 양성원이 재클린 뒤프레나 미샤 마이스키에 경탄하면서도 그들과 거리를 두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양성원의 연주 철학에서 ‘악보의 노예’를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오해다. 작곡가의 의도와 곡의 구조를 충분히 이해해야만 비로소 “연주자만의 자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 연주자는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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