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라토의 역사] - 파트리크 바르비에르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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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바르비에르 지음 | 이혜원 옮김 | 일조각 | 2013년 01월 30일 출간 | 344P
프랑스에서 1778년에 출간된『아카데미 사전』은 ‘거세된 자’라는 본래의 뜻을 가진 카스트라토(Castrato)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어린아이나 여자와 비슷한 성질의 목소리를 유지하도록 거세한 남자. 이탈리아에 많다.” 이 간단한 정의에 다르면 카스트라토는 이탈리아의 악덕이다. 하지만 파트리크 바르비에르의 『카스트라토의 역사』(일조각,2013)는 원래 이 풍습은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건너온 것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아온 이베리아 반도 남부는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문화와 예술 양식에서는 이슬람에 동화되었다. 아랍인의 지배 아래 있던 에스파냐 기독교도들의 아랍풍 예술 양식을 모사라베 양식(Mozarabic Art)이라고 하며, 모사라베 양식의 교회 음악을 모사라베 성가(Mozarabic Chant)라고 한다. 12세기부터 발달한 모사라베 성가는 고자(鼓子) 가수를 이용했다.
원래 교회 음악에서 고음을 내도록 훈련받은 이들은 팔세티스트(falsettisr: 팔세토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였으나 가성을 사용한 팔세토 창법은 남성이 타고난 음역보다 더 높은 음을 낼 수 있게 해주지만, 본래의 자연스러운 발성 기법으로 부를 때보다 음색이 가벼워지고 힘이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로마 교황청의 예배당인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에스파냐에서 카스트라토를 수입해서 썼다. 그러던 1599년 교황 클레멘스 8세(제위 1592~1605)가 처음으로 이탈리아인 카스트라토를 교황청 성가대에 입단시키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거세 수술 대유행”이 일어났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갈라지고 억지스러운 소리를 내는 팔세티스트를 알토와 소프라노 음역에서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조건 아래 카스트라토를 공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세계에서 명백한 불법인 신체 훼손죄를 무마하고 교회가 카스트라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남긴 유명한 글귀를 내세웠다.“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린도 전서 14장 34절)
교황이 이탈리아인 카스트라토를 공인하자, 네 개나 되는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를 보유한 나폴리 왕국은 아들 넷 이상인 농부는 누구든지 그중 하나를 거세시켜 교회에 봉사하게 해도 좋다고 제일 먼저 허락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은 카스트라토의 본거지라는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 이 오명을 벗기 위해, 오늘날 ‘음악학교’를 의미하는 콘세르바토리오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6세기 말, 나폴리에는 빈민층이 많았다. 그래서 1537년에 처음으로 ‘유지하다(Conservara)’라는 동사를 어원으로 가진 콘세르바토레를 세우게 되는데, 이 시설은 애초에 음악과는 무관했다. 콘세르바토리오의 설립 목적은 고아 및 빈곤층 아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관은 이탈리아인들의 생활 속으로 음악이 파고들면서 도시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17세기 전반부터 음악학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콘세르바토리오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였던 것이다.
거세 수술은 여전히 불법이었지만, 대도시 병원에서는 적법한 이유를 들러 공식적으로 거세 수술을 시행했다. 예컨대 카스트라토의 황금기에 많은 이탈리아인 아버지들은 아들을 변성기 이전(8~10세)에 카스트라토로 만들기 위해 탈장 치료를 핑계댔다. 선천적 기형, 심각한 승마사고, 짐승이 물어뜯음, 친구에게 잘못 걷어차임, 탈장 치료 등등 아들을 거세시킨 부모와 시술자를 파문에서 구할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카스트라토를 배출했던 궁촌에서는 대도시의 병원에 갈 돈도 없어서 동네의 약국이나 이발소에서 수술을 맡겼다. 어디서 거세 수술을 받느냐에 따라서 치사율은 10퍼센트에서 80퍼센트까지 차이가 났다.
“부모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일상적인 빈곤에 시달리던 부모들에게 아들을 거세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상당수의 카스트라토들은 콘세르바토리오에 아이를 한 명이라도 집어넣으면 당장 먹일 입이 하나 줄어든다는 점만으로도 실질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던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다.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고 고위 성직자로의 길이 열려 있었던 귀족 가문에서는 카스트라토가 배출되지 않았다.”
영화 파리넬리의 한장면
최초의 카스트라토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에 봉사할 목적에서 가수로 훈련을 받았으며, 교회의 성가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탈리아의 음악극(오페라)이 나날이 인기를 얻으면서 상황이 반전했다.“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오페라 무대에서 성공한 선배들의 모습에 홀려 교회보다는 극장에서 보다 쉽게 부와 명예를 얻으리라 기대하며 오페라 무대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약 230년 동안 카스트라토는 이탈리아 음악계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 안의 교황령에서는 여성 가수가 무대에 오를 수 없었지만 교황령 외의 지역과 유럽에서는 카스트라토가 활약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들이 환호를 받은 이유는 섬세하고 화려하고 명료하며 풍부한 음색과 민첩한 기교였다. 하지만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가 바로크 시대였다는 것도 놓칠 수 없다. 바로크 시대는 유독 ‘인공적인 것’,‘다른 뭔가 특별한 것’을 선호했다. 이때 카스트라토의 “성적 모호함은 분명히 그들의 강점”이었다. 게다가 16세기말경 이탈리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반까지 유행했던 바로크 사조는 성악에서도 점점 기교적이고 고음을 내는 가수를 필요로 했다.
1980년대부터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시대악기 연주’가 주목을 받았다. 시대악기 연주란 작곡가가 그 곡을 작곡했을 당시의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작곡가가 기대했을, 그리고 그 시대 관객이 실제로 들었을 음향을 재현하려는 연주 경향이다. 시대악기 연주는 시대악기와 연주법(연주관행)을 복원하면 되는데, 헨델 · 스카를라티 · 글룩 · 하이든 · 모차르트 · 로시니 등의 오페라에서 카스트라토에게 맡겨진 역은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바로 이 고민 때문에 카운터테너가 새삼 부각되었다. 카운터테너는 여성이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던 시대에 알토 또는 소프라노 음역을 구사하는 남성 가수다. 카운터테너라는 명칭은 현대에 붙여진 것이지만, 카스트라토가 등장하기 전 팔세토 창법으로 알토 내지 소프라노 음역을 구사했던 남성 가수들이 14~16세기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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