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한 베토벤을 위하여] -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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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 김주경 옮김 | 열림원 | 2017년 03월 20일 출간 | 180P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살해당한 베토벤을 위하여』(도서출판 열림원,2017)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1960년생 전천후 작가인 지은이는 이 책을 두 장르로 구성했다. 앞의 절반은 제목과 같은 에세이이고, 나머지 절반은「키키 판 베토벤」이라는 제목의 희곡이다. 파리 고등사범 출신인 지은이는 열다섯 살 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베토벤 음반을 듣거나 피아노로 연주를 했지만, 스무 살이 되면서 베토벤과 멀어졌다. 쇤베르크(1874~1951) ․ 베베른(1883~1945) ․ 불레즈(1925~2016)에 심취한 그는 특히 불레즈에 관심을 갖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수업까지 들었다. 현대의 미덕 또는 현대인이 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을 흡수하는 것이며,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무 살이 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약혼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시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지은이는 베토벤하고만 결별 한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 ․ 슈베르트 ․ 쇼팽과도 작별했다.
그가 베토벤과 재회하게 하게 된 것은 자신의 연극 홍보를 위해 코펜하겐을 방문했다가 그곳 미술관에서 <마스크: 고대 그리스부터 피카소까지>라는 전시회를 관람하고서다. 전시회장의 한 방은 베토벤의 흉상과 초상화에 할애되어 있었는데, 지은이는 그 많은 베토벤의 얼굴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베토벤이 서구 문명사회에 얼마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부터 지은이의 열변을 요약해 보겠다.
바흐의 음악, 그것은 신이 작곡한 음악이다. 모차르트의 음악, 그것은 신이 듣는 음악이다. 바흐는 개신교 신자였고, 명색만이기는 하지만 모차르트는 카톨릭 신자였다. 모차르트는 “받아들여”라고 속삭였고, 바흐는 “무릎 꿇어”라고 말했다. 반면 베토벤은 신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강하고 위대하고 놀라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베토벤은 신께 기도하는 어느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인간이여, 그대 스스로 자신을 도우라.” 베토벤의 음악, 그것은 신에게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설득하는 음악이다.
베토벤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확신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인간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했다. 예술은 이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류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인간적인 음악”이 베토벤으로부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신과 음악의 관계가 끊어졌다. 베토벤으로 인해, 신은 짐을 꾸려 악보에서 자리를 비우고 떠났다.” 베토벤이 주의 영광이나 마리아 찬미 같은 곡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전원>이나 <영웅>같은 교향곡 표제로 알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의 피날레가 인류애를 강조하는 합창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덧붙일 것은 <영웅> 교향곡의 영웅은 나폴레옹 같은 군주가 아니라 개개인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든 인간이다.
행진곡을 잘 활용 했던 베토벤 음악이 암시하고 있듯이, 베토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줄 아는 인간 영웅들에 의한 인류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견실했던 그의 “휴머니즘 ․ 영웅주의 ․ 낙천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정신이 잉태한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면서 <환희의 찬가>를 노래했던 베토벤의 희망은 파국을 맞이한다. 낙천적이고 영웅주의적이었던 인간의 진보는 유혈이 낭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도로가 되었다. 전체주의와 원자폭탄,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후유증은 18~19세기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여전히 인류가 진보하리라 믿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때 철학교사이기도 했던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는 코펜하겐 미술관에서 우연히 베토벤 흉상을 만나고 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또는 68혁명 전후에 전개된 반인간주의(반주체적 구조주의) 철학을 비판해야겠다는 벼락같은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코펜하겐에서 파리로 돌아와「키키 판 베토벤」을 탈고하고 나서, 그는 희곡에 미처 쓰지 못했던 20세기 주류 지식인의 반인간주의 사조를 비판한다. “베토벤은 두 번 죽었다. 19세기에 육체가 죽었고, 20세기에 그의 정신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휴머니즘도 상당 부분이 꺼져버렸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베토벤(인간의 꿈)이 살해된 자리에 구조가 대신 들어섰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는 개인의 능력을 죽였다. 경제구조, 재정구조, 정치구조, 미디어구조 들이 승리를 외치면서 개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을 믿지 않고, 개인의 자주권을 비웃는다. 아우슈비츠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을 분쇄시키는 권력, 전체주의를 상징하고, 인간의 본질을 비워낸 세상을 상징한다. 아우슈비츠가 증명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에는 혹 진보가 있을지 몰라도, 인류 안에는 결코 진보가 없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실패.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더 선해지지 않았고, 더 똑똑해지지도 않았으며,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지도 않았다. 야만인들이 아무리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고, 고도의 기술까지 통제할 수 있다 해도 개인의 불꽃이 없으면, 야만성 안에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지은이는 서양의 예술적 전위(avantgard)와 사회문화적 탈근대(postmodernism)가 근대 계몽주의가 파산한 폐허에 기생하고 있다면서,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반인간주의 예술가와 지식인을 드세게 비판한다. “지식인들은 절망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충격을 받고,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비관주의는 사회 속에서 생기는 온갖 견해들을 갖가지 다양한 색깔로 물들인다. 때로는 허무주의, 흔하게는 냉소주의,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쾌락이나 이익을 숭배하는 맹렬한 개인주의 색깔을 띤다, 그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 가지가 있으니, 인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었다.” 이 도저한 비판 속에 한때 그가 빠져 들었다는 쇤베르크 ․ 베베른 ․ 불레즈도 포함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키키 판 베토벤」은 실버타운에 사는 네 명의 할머니(키키 ․ 캉디 ․ 조에 ․ 라셸)가 골동품 가게에서 어쩌다 구입한 베토벤의 안면 석고부조(데드마스크)로부터 삶의 의의와 기쁨을 새로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희곡의 중심에 네 할머니의 아우슈비츠 견학이 있는데, ‘아우슈비츠 이후에 베토벤은 침묵에 빠졌다’는 식의 강변에 구토가 나올 뻔 했다. 어느 유럽 작가나 마찬가지로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역시 아우슈비츠에 대해 강박적인 죄의식을 토로하면서, 현재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하는 인종 살해와 절멸수용소를 건설한 것과 똑같은 팔레스타인 장벽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이런 위선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인간과 인간의 꿈을 살해했다는 주장에서도 볼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인이 아프리카와 신대륙에서 무수히 죽인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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