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Tribute - 한국 퓨전의 기틀 마련했던 선구적인 드러머 전태관 (봄여름가을겨울)
- 엠엠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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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는 결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요소가 무척이나 많은 음악입니다. 게다가 그 안에 수많은 하위 장르들은 또 무엇이며, 왜 거장들이라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많이 음반들을 많이 발표했는지...단지 몇십장 정도의 작품, 앨범만으로 얼추 이해가 되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재즈는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죠. 그래서 대중들과의 거리가 이토록 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Easy Come, Easy Go’ 라는 서양의 격언이 말해주듯, 뭐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들은 그만큼 빨리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나 손에 닿을 것 같지 않던 ‘재즈’라는 음악이 조금씩 귀에 들리고 리듬을 타게 되는 순간, 즐거움과 희열은 여느 팝 음악들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감동을 전해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자! 이제부터 한달에 한번씩 여러분들을 재즈의 신세계로 데려가 볼 참입니다. 우선 기존의 잡지에서 다루어지는 아티스트 소개와 작품이야기를 기본으로 하되, 때론 화제가 되는 이슈거리에 대한 논의와 에세이 형태의 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 칼럼의 형식도 시도해볼 참이며, 또한 공연후기기사까지 소재와 형식의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하게 가져와 한번 풀어 나가볼 참입니다.
비록 이 음악이 어렵고 광범위하다지만 최대한 쉽고도 명쾌하게, 마치 NBA 농구선수들의 시원시원한 덩크슛을 보는 것처럼 한번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럼 출발해볼까요?
JAZZ DUNK #10 - 한국 퓨전의 기틀을 마련했던 선구적인 드러머, 전태관 (1962.5.16 ~ 2018.12.27)
글/MMJAZZ 편집장 김희준, 사진/봄여름가을겨울
아마도 국내대중음악사에 1986~8년 이 3년간은, 87년 6월 항쟁으로 대변되는 현대정치사의 큰 전환점과 맞물려 기념비적인 음반들 또한 동시에 쏟아져 나온, 여러모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일 겁니다. 이 3년 동안 쏟아져 나온 가요사의 명반들을 대략적으로 체크해 보면 이러합니다.
이문세 4집, 부활 1,2집, 시나위1,2집 김현식 3,4집, 봄.여름.가을.겨울 1,2집, 어떤날 1집, 유재하 1집, 한영애 2집, 시인과 촌장2,3집, 추억들국화, 최성원 1집, 신촌블루스 1,2집...
이 작품들은 이전까지 TV를 주 매체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던 트로트 성향 다분한 방송용 국내대중음악들이 갖고 있던 음악적 성격과는 아주 다른데다, 각 아티스트별 장르적 지향 또한 제각각 차이를 둘만큼 다양했었죠(굳이 3년이라는 시간을 상정해두긴 했지만,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넓게는 8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가장 만개했던 시점을 저때로 보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에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영미권 팝/록 음악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하나씩 흉내 내고 따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이라는 겁니다. 그전 국내음악가들이 그렇다고 모두 뽕끼로 점철된 음악만을 했느냐면 그건 결코 아닙니다만, 이 시기 때만큼 봇물 터지듯 다양한 성격의 장르음악들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던 적은 이전까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AOR, 헤비록, 포크, 발라드에서 블루스까지..
'봄.여름.가을.겨울' 또한 이 시기에 등장했죠.
그런데 또 이들의 지향점은 다른 아티스트들과는 또 '다른 영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다소 흔해진 퓨전(Fusion)이라는 단어, 그 말이 지칭하는 음악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던거죠. 그 당시에는 퓨전이라는 말조차 국내엔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음악 또한 극소량의 라이선스 음반과 빽판을 제외하고서는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간혹 황인용씨를 비롯한 소수의 라디오DJ나 잡지에서 기사로 다루어진 적이 있었고 방송시그널및 광고 배경음악으로 자주 사용되긴 했습니다만, 일반대중들에겐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음악이었죠. 마치 폴 모리아악단이나 리처드 클레이더만과 같은 이지리스닝 경음악과 비슷한 종류로 인식되기도 했었습니다)
GRP레이블로 대변되는 이 음악들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 스튜디오 녹음 및 음향 기술, 전자악기들의 발전과 함께 맞물려 연주음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급격한 성장을 이뤄나갔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김종진과 장기호, 박성식과 전태관은 모두 동년배였으며(후배였던 유재하는 잠시 있다가 솔로로 따로 활동) 음악적인 관심사도 비슷한 면이 있었는데 이들은 리 릿나우어나 카시오페아, 래리 칼튼, 밥 제임스, 얼 클루, 조지 벤슨, 척 맨지오니, 마이클 프랭스같은 이 방면 뮤지션들의 음반들을 어떻게 힘들게 구해듣고, 거기에 담긴 음악을 귀로 듣고 카피하면서 독학으로 이 음악들을 습득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차후 재즈이론가이신 이판근 선생에게서 재즈이론도 배우며 당시로선 예를 찾기 힘든 퓨전계열 연주음악에의 꿈을 가슴 한켠에 키워나갔고 결국 자신들의 첫 앨범에서부터 일부를 구체화시켜내었죠.
국내 대중들의 인식 및 여러 현실상 자신들의 앨범 모든 곡들을 연주곡으로 다 채워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두세곡씩은 꼭 인스트루멘틀 트랙을 담아내려 했던 건, 바로 이 시절 자신들이 좋아했고 또 무척이나 하고 싶었던 그 음악들에 대한 애착이자 도전, 꿈과 같은 것이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지난해 12월 27일 너무도 이른나이에 돌아가신 드러머 전태관의 연주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시절 국내 대중음악계 드러머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4박, 8박 비트를 반주의 차원에서 연주하는 경우만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며 그 외 다른 접근은 할 생각조차 못했던 때였습니다. 심벌의 필인 같은 건 개념에 아예 장착되지도 않았을 때, 바로 그 시기에 전태관은 싱코페이션, 홀수박, 심벌필인등을 인식하고 그걸 직접 소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뮤지션이었습니다.
16비트 펑크(Funk) 그루브를 제대로 실연할 수 있었던 드러머는 그 당시로선 전태관이 유일했으며, 선배격인 세션 드러머 김희현 정도만이 어느 정도 구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90년대 중반까지도 개선되지 못해서 당시 야샤(Yasha), 김현철, 손진태등 몇 안되는 국내 뮤지션들의 퓨전계열 연주가 담겨진 음반들은 거의 다 실제 드러머가 아닌, 미디,드럼 프로그래밍으로 드럼 파트사운드를 만들곤 했습니다. 그나마 금전적인 여건이 되는 뮤지션들의 경우 외국으로 가서 그곳 세션주자와 함께 앨범을 녹음했었죠)
무엇보다 전태관의 드러밍에는 확실한 손맛, 탄력이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정박을 때리더라도 그는 밋밋하거나 기계적이지 않고 뚜렷한 그루브감을 전해주는데 이는 요즘 젊고 테크닉 좋은 후배 드러머들에게서도 의외로 잘 발견되지 않는 부분이죠. 황치훈의 첫 솔로 앨범 히트곡인 '추억속의 그대'나 그룹명과 동명곡인 봄.여름.가을.겨울 ‘알 수 없는 질문들’ 그리고 연주곡으로는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 ‘Geko Funk’에서의 드럼연주가 아주 좋은 표본중 하나라고 봅니다.
어느덧 이들이 처음 앨범을 발표한 지 30년이 넘게 흘렀고 그 사이 국내 음악계는 연주음악의 범위도 다양해지고, 이를 추구하는 아티스트의 수도 분명 비교하기 무색할 만큼 훌쩍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맨 처음 뭔가를 시작하는 건, 그것도 아무런 토양과 저변이 없는 불모지와 같은 상황에서 시도한다는 건 실상 너무나 막막하고 또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오직 그 음악을 직접 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3번째 앨범에서부터 이들은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미국의 일류 세션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그곳 스튜디오를 아예 통째로 빌려 함께 교류하며 일견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음악적 도전을 시도했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3장의 앨범을 그렇게 만들었죠. 3,4집의 경우 앨범당 2억5천만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런 시도를 한 것은 국내대중음악사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이 유일했을 겁니다. (이후 이승환, 이승철 같은 몇몇 후배뮤지션들이 앨범제작을 위해 해외로 나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죠)
뭔가를 계산하고 따져보고 했더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
이 진취적인 팀의 리듬을 담당해 작품마다 도전을 계속 이어나갔던 전태관은 그저 반주의 영역에 머물러있던 드럼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으며, 차후 실력 있는 후배들이 등장하는데 좋은 롤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편협하고 일천했던 당시 국내대중음악계에 선구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던 드러머 전태관!
그의 때이른 영면에 그저 안타까움과 아쉬움만 삼킬 따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엠엠재즈 웹사이트 관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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