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베넷(Tony Bennett) 추모 칼럼 - 한세기 관통한 위대한 스탠더드 메신저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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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토니 베넷(Tony Bennett) 1926.3 ~2023.7
한 세기를 관통한
위대한 스탠더드 메신저!
글/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토니 베넷, 그를 통해 비로소 20세기와 이별하다
지난 2005년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선 당시 79세의 토니 베넷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50년 동안 노래만 불렀습니다.......아, 여기서 솔직히 고백 하나를 해야겠네요. 실은 60년 동안 불렀습니다. (웃음)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60년 동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7월 21일, 그의 아흔일곱 번 째 생일을 13일 앞두고 눈을 감은 토니 베넷은 그날 무대에서 말했던 그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16년 동안, 그의 나이 95세까지 계속 노래를 불렀던 그는 지금쯤은 아마도 자신을 꽤 대견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2021년 8월 생애 마지막 공연을 레이디 가가와 가졌던 그는 이미 몇 달 전에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고 이 병은 이미 4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토니 베넷의 업적이 단지 75년이라는 전대미문의 긴 경력(그는 1946년에 직업 음악인으로 데뷔했다)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열아홉 개의 그래미 트로피와 평생 공로상을 받았으며 6천만 장의 앨범을 판매했고, 백악관의 초청으로 존 F. 케네디와 빌 클린턴에게 노래를 선사했다(베넷은 철저한 민주당 지지자였다). 그는 케네디 센터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참가했던 소수의 백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영국을 방문한 넬슨 만델라, 즉위 5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서 버킹검 궁전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가장 빛나는 유산은 역시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일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음악의 풍경을 남겨두었고(이로 인해 사람들은 뉴욕 토박이인 토니의 고향을 샌프란시스코로 착각했다) 이 노래는 샌프란시스코시의 공식 축가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젊은 음악팬들은 21세기의 슈퍼스타들과 쉼 없이 작업한 인물로 토니 베넷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두 장의 앨범을 함께 녹음한 레이디 가가는 물론이고 다이애나 크롤, 마이클 부블레, 존 레전드, 존 메이어,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라 존스가 모두 그와 듀엣 녹음을 남겼다. 지난 세기부터 활동한 현역 음악인들을 열거하자면 스티비 원더, 셰릴 크로, 보니 레이트, K. D. 랭, 빌리 조얼, 윌리 넬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제임스 테일러, 폴 매카트니, 엘튼 존, 셀린 디옹, 스팅, 보노, 안드레아 보첼리 등 그 화려한 인명은 지면이 모자를 정도다. 그와 함께 녹음을 남긴 케이 스타(Kay Starr), B. B. 킹,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조지 마이클(이중에서 레이, 아레사, 조지는 토니보다 늦게 태어났다) 등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토니 베넷의 출세작이자 그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명곡 I Left My Heart In San Fransisco 가 담긴 1962년도 동명 타이틀 앨범.
“앞으로 60년 동안 노래하고 싶습니다.”
토니 베넷은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재즈의 영향력을 21세기까지 들려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오늘날 공식적으로 ‘트래디셔널 팝’이라고 불리는 이 음악은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중반까지 미국 대중음악을 지배했던 재즈의 한 종류, 스윙에서 파생되어 나온 음악이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요동칠 때 스윙은 급작스럽게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여기서 갈려 나온 트래디셔널 팝은 쉽사리 사라질 수 없었던 스윙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냇 ‘킹’ 콜로 대표되었던 이 음악은 소급해서 올라가자면 빙 크로즈비에 의해 시작되었고 시나트라와 콜 이후 그 횃불을 이어받은 인물이 토니 베넷과 조니 마티스였다. 때로는 현악 오케스트라 반주로, 때로는 소규모 밴드 혹은 빅밴드로 노래 불렀던 토니 베넷은 미국 대중음악의 한 자리에 재즈의 자리를 늘 확보해 주었다.
아울러 1920년대 뉴욕 맨해튼의 소위 ‘틴 팬 앨리’(Tin Pan Alley: 작곡가 사무실이 운집했던 맨해튼의 이 골목에서 들리는 여러 대의 피아노 소리는 마치 양철 냄비를 두드리는 것 같이 들렸다는 데서 이 명칭이 생겼다) 레퍼토리는 토니 베넷을 통해 불멸의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이미 시나트라로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제롬 컨, 어빙 벌린, 콜 포터, 조지 거슈윈, 해럴드 알렌 등의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여기에 재즈 작곡가 듀크 엘링턴의 작품까지 시대를 초월한 노래로 만들었다. 토니 베넷은 그 생명을 21세기까지 끌고 간 주역이었다. 금세기에 들어서도 토니가 그들의 노래를 여전히 부를 때 그 곡들은 이미 작곡된 지 백 년 가까운 세월을 견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들은 토니 베넷의 표현 그대로 “미국의 고전이었다.”
’70년대의 좌절
하지만 이 부류의 가수들이 지난 20세기를 건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급변했던 대중음악과 냉혹한 쇼비즈니스의 세계 속에서 악전고투의 시간을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한파는 1957년 로큰롤과 엘비스 프레슬리에 의해 몰아닥쳤다. 이전 시대 트래디셔널 팝의 인기가 드높았던 것만큼 엘비스 등장 이후 이 음악의 쇠락은 그 경사가 너무도 가팔랐다.
어떤 의미에서 토니 베넷은 트래디셔널 팝 황금시대의 마지막 주자라고도 할 수 있다. 1951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활동을 시작한 그는 11년 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발표했지만 엘비스 이후 비틀스로 대표되는 로큰롤의 2차 돌풍은 이미 2년 뒤에 예약되어 있었다. 1960년대 로큰롤 시대에 컬럼비아 레코드의 회장으로 부임한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토니 베넷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팝을 부르도록 요구하면서 1957년부터 토니와 함께했던 재즈 피아니스트 랠프 샤론과의 결별을 권유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은 규모가 큰 음반사에서 매우 낯익은 풍경이었다. 버브 레코드(당시 이 음반사는 MGM 레코드 산하 레이블이었다)에서 8년간 진행되었던 엘라 피츠제럴드의 ‘송북 시리즈’는 예산 삭감으로 중단되었고, 머큐리의 세러 본, 아틀랜틱의 카멘 맥레이와 멜 토메도 새로운 팝을 부르라는 음반사의 압력에 신음하고 있었다. 캐피틀 레코드의 냇 킹 콜은 -토니 베넷의 증언에 의하면- 결국 그 수모를 이기지 못한 채 1965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시나트라는 아예 자신의 음반사 리프라이즈를 차리고 독립해버렸다.
선배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한 모습. 1970년대 중반
1972년 결국 컬럼비아 레코드를 떠난 토니 베넷은 버브, 판타지 레코드 등과 계약을 맺다가 1979년에 이르러 음반사는 물론이고 매니저, 소속사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파산한데다가 이혼의 상처 그리고 코카인 중독의 덫에 걸린 53세의 토니 베넷은 록밴드로 활동하고 있던 아들 대니와 데이에게 구원요청의 전화를 걸었다. “봐라. 난 여기서 이렇게 망했다. 이제 사람들은 내 음악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다음 세기를 향한 교두보
그런 면에서 토니 베넷의 재기는 기적과도 같았다. 장남 대니는 이때부터 아버지의 매니저가 되어 숨겨져 있던 그의 수완을 발휘했는데 아들을 통해 토니 베넷은 1986년 컬럼비아 레코드와 다시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음반사로 14년 만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한 가수의 재기였을 뿐만이 아니라 재즈/트래디셔널 팝의 부활이었다. 컬럼비아는 이듬해에 토니 베넷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스무 살의 해리 코닉 주니어와 계약을 맺었다.
토니 베넷의 평생 음악 파트너인 반주자겸 피아니스트 랠프 샤론과 함께 한 모습
새로운 토니 베넷의 활동에는 꼭 지켜야 할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공존했다. 우선 그는 오랜 음악적 동지이자 재즈계의 손꼽히는 반주자 랠프 샤론을 다시 영입함으로써(토니는 “랠프의 반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고 극찬했다) 재즈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줬고 동시에 ’90년대 팝의 첨단을 주도했던 프로그램 ‘M-TV 언플러그드’에 출연하는 예상치 못한 도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이 라이브 콘서트 프로그램은 폴 매카트니, 스팅, 머라이어 캐리, 에릭 클랩튼, 펄잼, 로드 스튜어트, 듀란듀란, 너바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밥 딜런, 이글스 등 초호화 출연진이었고 여기에서 토니 베넷은 유일한 ‘록 이전 세대’의 아티스트였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을 놓고 출연이 내키지 않은 토니와 그를 설득하려는 대니의 갈등은 꽤 심각했다. 결국 자식 이기는 아버지는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니가 옳았다. 동시에 토니의 노래는 새로운 팬들에게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그의 앨범 [MTV Unplugged]는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했고 이로써 21세기로 넘어가는 그의 교두보는 완성되었다.
'90년대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1994년도 MTV 언플러그드 라이브 앨범.
진솔한 목소리
[MTV Unplugged]에서 토니 베넷은 마이크를 피아노 위에 내려놓고 <Fly Me To the Moon>을 불렀다. 마치 오페라 가수처럼 ‘언플러그드’로 노래한 것이다. 그는 이미 68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량은 너무도 풍부했으며 즉흥적인 프레이즈, 딕션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보다 1년 전이었던 1993년 11월 팔리아멘트 슈퍼밴드의 일원으로 토니가 내한해서 역시 마이크 없는 노래로 세종문화회관 2층 객석까지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전할 때 소름은 내 양팔을 뒤덮었다. 본명 안토니 베네데토(예명 토니 베넷은 명 코미디언 봅 호프가 붙여준 것이다)는 역시 이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벨칸토의 계승자였다. 같은 이탈리아계이자 그의 선배이며 노래에서는 절대로 2인자가 되기 싫었던 프랭크 시나트라(그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스탠더드 해석에도 흠을 잡을 정도였다)도 이렇게 말했다. “이 바닥에서 최고의 가수는 토니지.”
하지만 토니 베넷은 시나트라 혹은 냇 킹 콜과 같은 미성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비교적 거칠었으며 시나트라나 콜처럼 부드러운 저음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달랐다.’ 그리고 진실했다. 절대 과도한 감정을 넣지 않으면서도 모든 노래에 겸손하게 진심을 담은 그의 목소리는 다른 크루너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서민의 체취, 노동계급 출신의 소박함을 갖고 있었다. 가난했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하루 종일 재봉틀에 앉아 일하며 삼 남매를 키운 어머니를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는 그의 노래에는 매끄러운 음성 너머의 그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부른 20세기 초 미국 스탠더드 넘버들은 이민자들로 넘실댔던 맨해튼 뒷골목의 풍경을 지금까지 사실적으로 전해준다. 그래서 그가 떠난 지금, 우리는 20세기라는 한 시대와 비로소 진정으로 이별한 것이다. 몇 해 전부터 그와의 이별을 누구나 각오했지만 자꾸 그의 음반을 듣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15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함께 한 토니 베넷과 레이디 가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한 [Check to Check]은 그해 그래미 트래디셔널 팝 보컬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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