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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k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 칼럼'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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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t Blakey _ 12월호 특집 기사용 사진.png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100th Birth Anniversary 

 

‘음악은 일상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것이다’

 

몸전체가 열기와 에너지로 충만한 하드 밥의 화신! 그의 연주를 들으면 정말이지 눈앞에서 엄청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음악이 새롭고 구식이고를 이야기하기 전에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성을 저격해 바로 흔들어내죠. 그건 재즈 메신저스의 음악이 나온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드 밥이라는 전형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음에도, 놀랍도록 생생하고 탄력이 넘치며 폭발하는 듯한 열기로 충만한 그의 음악! 이런 음악과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그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가공할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던 걸까요? 이 칼럼은 우리에게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서문/편집부

본문/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올해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트 블레이키를 이 글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 한다.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 . 생전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불렀던 애칭을 따르면 ‘부(Bu)’다. 이 이름 속에는 그의 철학과 성격이 선명하게 담겨 있으므로.

 

부하이나는 그의 종교였던 이슬람교의 세례명이다. 1948년 그는 배를 타고 서아프리카에 도착해 나이지리아, 가나 등지에서 아프리카 타악 연주에 깊이 심취한 바 있다. 이 여행의 결과는 대략 10년 뒤인 1957~’58년에 녹음된 앨범 <리듬의 향연 Orgy in Rhythm>,<타악기들의 축일 Holidays in Skins> (이상 블루노트)로 나타났는데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재즈의 폴리리듬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1948년 여행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오로지 음악만이 아니었다. 이때 그가 얻은 세례명이 부하이나였으며 그는 이 이름으로 보다 독실한 무슬림이 되었다.

 

아트 블레이키가 이슬람교를 믿게 된 것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였다. 1947년 말, 부의 밴드는 블루노트 레코드와 두 장의 78회전 음반을 녹음했는데 사히브 시하브(알토 색스), 무사 칼림(테너 색스) 등이 속해 있었던 당시 8중주단의 이름은 ‘아트 블레이키의 메신저스’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세례명을 받은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그는 빅밴드를 결성하는데 이 17인조 빅밴드의 이름 역시 ‘세븐틴 메신저스’였다.

 

그가 평생을 걸쳐 사용하게 되는 밴드 이름 ‘메신저스’는 원래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사라는 의미였다. 부는 밴드 멤버들을 가급적이면 무슬림 가운데서 선발하려고 했고 세븐틴 메신저스 시절에는 밴드 멤버들과 <코란>을 강독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 ’56년까지 부는 이슬람어 공부를 꾸준히 해나갔다.

 

‘부’뿐만이 아니었다. ’47년부터 ‘부’와 함께 했던 트럼펫 주자 케니 도햄이 재즈 메신저스를 거쳐 자신이 결성한 밴드의 이름 역시 ‘재즈 프라핏(Prophet: 선지자)’이었다. ‘부’에게, 그리고 밴드 멤버들에게 재즈는 종교와 같은 것이었고 음악을 연주하는 그들의 태도는 진지한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82년 뉴욕에 위치한 클럽 세븐스 애버뉴 사우스에서 있었던 아트 블레이키와 재즈 메신저스의 공연 모습을 보면 부는 공연이 끝날 때 즈음 무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쥐고 청중들에게 짤막한 연설을 한다.

 

“여러분, 재즈에 투자하세요. 그것은 한 달에 단 한 장, 재즈 음반을 사달라는 겁니다. 꼭 재즈 메신저스 음반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하드코어’ 재즈음반이면 됩니다. 그것은 최고의 문화적 투자입니다.”

 

2 1964년 앨범 Free for All 을 작업할 당시 아트블레이키와 피아니스트 시다 왈튼.jpg

1964년 앨범 [Free for Al]l 을 작업할 당시 아트블레이키와 피아니스트 시다 왈튼

 

하드코어 재즈. - 스트레이트 어헤드 재즈, 정통 재즈에 대한 짧고 강력한 옹호. 이 한 마디의 말만으로도 메신저로서의 그의 사명감은 뜨겁게 전달된다.

하지만 재즈 메신저스의 멤버였던 윈턴 마설리스는 ‘부’에 대한 글 한 편을 이렇게 시작한다. “드러머이자 밴드 리더인 아트 블레이키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단어는 ‘모순’이다.” 음악과 신앙에 앞에서 독실한 그의 모습은 다른 일상 속에서는 종종 온데간데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부’의 부인(법적 혼인과 사실혼 관계의 부인)은 모두 네 명이다. 그들 사이에서 ‘부’는 모두 열 명의 자녀를 낳았고, 모두에게 그의 세례명 부하이나를 성(姓)으로 주었다. 하지만 부는 늘 전처들에게 무관심했고, 두 번째 부인의 경우 두 아이를 낳았지만 첫 번째 부인과 의 이혼이 마무리 되지 않아 결국 법적 혼인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산 골초로(앨범 <프리덤 라이더 Freedom Rider>와 <부하이나의 즐거움 Buhaina’s Delight>의 표지를 보시면 안다)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많은 비밥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헤로인을 복용했다. 헤로인을 투약하기 전에 코카인, 마리화나 등을 ‘애피타이저’ 쯤으로 즐기는 일도 다반사였다.

 

1956년 도널드 버드, 행크 모블리, 호러스 실버, 더그 워킨스로 짜인 재즈 메신저스 멤버들은 한꺼번에 팀을 이탈했다. 부의 전기 <재즈 메신저 Jazz Messenger>를 쓴 작가 레슬리 고스는 그해 재즈 메신저스가 메이저 음반사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가 멤버들에게 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는 헤로인 중독자가 밴드 리더인 경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1년 뒤 역시 대형 음반사인 RCA-빅터 산하 빅 레코드와 녹음했던 ’57년 재즈 메신저스 멤버들- 빌 하드먼, 재키 매클린, 조니 그리핀, 샘 도커리, 스팽키 드브레스트 – 역시 한꺼번에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약물로 인한 급여 미지급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부’는 무슬림으로서의 삶과는 정 반대편에 있었던 것이다.

 

3 1964년 웨인 쇼터와 커티스 풀러와 함께 있는 아트 블레이키.jpg   (좌로부터) 웨인 쇼터, 커티스 풀러와 함께 있는 아트 블레이키 / 1964년 

 

하지만 이 양면성과 모순은 ‘부’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에서 조화시킬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두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고 외가 친척들 손에 자라다가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제철소에서 일하면서 피아노와 드럼을 어깨 너머로 배웠던 부는 본질적으로 피츠버그 거리의 소년이었으며, 그러므로 그가 제일 먼저 습득했던 것은 거리에서 생존하는 방법이었다.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신동 피아니스트 에럴 가너의 연주를 보고 재빨리 피아노를 포기하고 드럼으로 악기를 바꾼 것, 그리고서 얼마 후 자신의 사중주단을 결성할 수 있는 수완 모두가 피츠버그의 거리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 거리에서 뮤지션으로, 밴드리더로 살기 위해서 헤로인쯤은 너끈히 할 수 있는 용기를 허세로 여기기에는 당시 그는 너무도 어렸다.

 

그럼에도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통솔할 줄 아는 리더십을 가졌다. 열다섯 살에 자신의 첫 밴드를 만들었던 ‘부’는 2년 뒤 열일곱에 그의 빅밴드를 결성했는데, 그 장소도 고향 피츠버그에서 멀리 떨어진 캘리포니아 주였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부’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공평하시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내게 신은 명석한 두뇌를 주었으니까.”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그였지만, 그는 리허설 중에 모든 음악을 머릿속에 넣었으며 그래서 빌리 엑스타인 오케스트라에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드럼을 연주할 수 있었고, 최고 실력의 연주자들을 그의 주변으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 그가 일관되게 해왔던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였다.

 

에이전트 잭 휘트모어는 1960년 ‘부’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그는 이미 ’55년부터 마일스 데이비스의 에이전트였고 이후 셀로니어스 멍크, 스탠 게츠, 아마드 자말의 일을 도맡아 했으니 자타가 재즈 매니지먼트의 거물로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부’는 잭에게 이야기 했다. “내 일거리는 잠시라도 끊기면 안 돼.” 그러한 부의 요구를 잭은 평생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런 ‘부’에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 이후로 아트 블레이키-재즈 메신저스와 녹음하길 원하는 음반사는 등장하지 않았고 그것은 197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재즈-록, 소울 재즈의 퓨전 시대에 계속 하드 밥을 고수하던 재즈 메신저스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때에도 ‘부’의 신인 발굴은 멈추질 않았다는 점이다. ’66년 척 맨지오니, 키스 자렛을 발굴했던 것을 시작으로 우디 쇼, 발레리 포노마레프, 스티브 터레, 로빈 유뱅크스, 버디 테리, 데이비드 슈니터, 바비 와트슨, 조지 케이블스, 제임스 윌리엄스, 데니스 어윈은 이 암흑기에 부와 함께 했던 명인들이었다. 이들은 ’80년대 메신저스를 통해 등장하는 마설리스 형제, 테렌스 블랜처드, 도날드 해리슨, 빌 피어스, 찰스 팸브로프의 직계 선배들로 결국 ’80년대의 재즈 르네상스는 부와 재즈 메신저스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5 아트 블레이키의 80년대초 모습. 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테렌스 블랜차드와 도날드 해리슨이 함께 하고 있다..jpg

아트 블레이키의 80년대초 모습.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테렌스 블랜차드와 도날드 해리슨이 함께 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어떻게 암흑기를 뚫고 부활한 것일까? 그것은 ‘부’의 음악 안에 담긴 음악적 희열, 재즈의 환희, 그것들이 전하는 들끓는 에너지 때문이었다. 그것은 재즈의 진가였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스윙. 그것은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이후 오로지 재즈 메신저스만이 구현한 음악의 즐거움이었으며 그 속에서 드러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부’의 손놀림은 그 누구보다 명백히 들려주었다. 하나의 악절이 매듭을 지었을 때 오로지 ‘부’의 드럼만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했으며 절벽처럼 떨어지는 낙폭의 다이내믹을 통해(그의 프레스 롤은 얼마나 섬세하고 또 강렬한가!) 그들이 추구하는 하드 밥의 위용은 하나의 절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술 마시기 위한 듣기 편한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심연의 감정들, 그 역동의 표현이 재즈란 사실을 ‘부’와 재즈 메신저스는 몸으로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생존이 절실했던 한 가난한 소년의 귀에 들렸던 음악의 환희였다. 그 순간 그는 거리의 왕이 되었으며 그의 말처럼 “온갖 일상의 때들은 완전히 씻겨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것이 음악이고 그것이 재즈다. 모든 곳에서 음악이 넘쳐나 음악의 가치가 땅 바닥에 패대기쳐진 21세기에, 부의 100번째 생일이 말하는 것은 음악의 가치, 그것이 선사하는 기쁨, 바로 그것이다.

 

사진/Chuck Stewart, Francis Wolff, Michael Cusc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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