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셀 말론(Russell Malone) 추모칼럼 - 진솔한 인간미 음악에 투영해 낸 아름다운 기타맨
- Joh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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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ute Special
진솔한 인간미 음악에 투영해 낸
아름다운 기타맨
러셀 말론(Russell Malone) 1963.11 ~ 2024.8
2023년 9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 재즈 공연 기획사인 플러스히치로 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게 기타리스트 러셀 말론의 워크숍을 통역해 줄 수 있냐는 요청의 전화였다. 사실 조금의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전까지 통역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 자리를 잘 도울 자신이 없었다. 굳이 통역이라는 짐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 끝에 수락했다. 아마 러셀 말론이 아닌 다른 기타리스트였다면 굳이 통역을 하겠노라고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그 요청을 받아들여 러셀 말론의 통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와 관련해서 직접 경험한 몇몇 개인적인 일화들 때문일 것이다. 본문/재즈 기타리스트 김준범
2016년 초부터 중순 무렵까지, 뉴욕에서의 유학 막바지 시절 즈음, Bar Next Door라는 기타리스트의 성지인 클럽에서 매달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비록 코로나 시기에 그곳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 비교적 저렴한 $12 라는 공연료에 맥주 한 병(+팁)의 값, 합해서 $20 정도면, 현재 미 동부 재즈 신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들인 피터 번스틴(Peter Bernstein), 라게 룬드(Lage Lund), 길라드 헥슬먼(Gilad Hekselman), 마이크 모레노(Mike Moreno), 조나단 크라이스버그(Jonathan Kreisberg) 같은 쟁쟁한 실력자들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따로 어쿠스틱 피아노가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클럽에 비해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공연이 유독 많이 열리곤 했었다. 3월 어느 날 그곳에서 공연을 하던 필자는 2부 중간 즈음에 스탠더드 발라드 곡 I Fall in Love Too Easily 를 연주했는데, 이 곡이 끝난 후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두드렸다. 무심결에 나는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내가 너무나도 많이 봐온 그분, 러셀 말론(Russell Malone)이 서 있었다. 나는 멍해져서 순간 말을 잃었고 그는 “야 소리 좋은데.”(Hey, Man, Sounds Great!) 이라고 직접 격려의 말을 해주셨다. 그리고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이후 난 관객석으로 향해 “지금 나간 사람은 제가 이곳에 오기 오래 전부터 유튜브로 수없이 봐오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러셀 말론이에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관객들로부터 까닭 모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클럽이 기타 연주자가 출입문을 등지고 연주하는 구조라서 러셀 말론이 들어오는 것, 그리고 그가 필자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지만, 연주 후에 함께 한 드럼, 베이스 주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 곡을 거의 다, 그것도 꽤나 주의 깊게 듣고 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내 앞에 그가 있었던 것을 알았다면 난 무척이나 긴장했거나, 백번 양보해도 그의 존재를 많이 의식해 연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을 게 뻔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 생각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동양인 꼬마의 연주에 굳이 격려의 말을 남기게 했을까? ‘동양인 꼬마’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뉴욕에 있는 동안 나는 어딘지 모르게 매우 움츠려 있었다. 길거리에 다닐 때도, 누가 불시에 말을 걸 때도, 이방인으로서, 뭔가 끼어 주지 않는 사회에 나를 증명하려 애쓰기도 하고 포기도 하고 다시 도전하고를 반복하는 서러운 긴장감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여간한 타인들에게 별 관심조차 주지 않는 그 사회에서, -물론 다른 한편으론 나의 심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겠지만- 음악적으로 더 이룰 것이 없어 보이는, 명인의 위치에 오른 그가 보여준 따뜻함은 당시 필자에게는 참으로 큰 의미와 힘이 되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러셀 말론은 자주 후배 기타리스트의 공연에 찾아오곤 했었다. 막 인지도를 넓히기 시작한 댄 윌슨(Dan Wilson)이 조이 디프란체스코(Joey DeFrancesco) 트리오 멤버로 재즈 스탠더드 클럽에서 연주할 때도 관객으로 직접 찾아왔었는데, 리더인 조이는 기타리스트 댄 윌슨의 멘토가 공연을 보러 왔다면서 관객석에 있는 러셀을 소개했었다. 또 앞서 언급한 Bar Next Door에 기타리스트 요탐 실버스타인(Yotam Silberstein)을 보러 갔었는데, 그날도 러셀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려서 요탐의 연주를 감상하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러한 모습들은 내게, 너무나도 식상한 말이지만, 러셀이 유명 연주자이면서 그와 무관하게 ‘참 따뜻한 심성을 지닌, 인간다운 사람’으로 느껴지게끔 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다움은 고스란히 그의 음악과 연주에 배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의 음악에 담긴 본질
러셀 말론의 음악을 들으면 시기 및 장르적으로 하드 밥(Hard-Bop) 사운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라인적으로는 블루스 음계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즈의 교과서라 할수 있는 비밥 언어가 잘 어우러져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이 부분은 러셀의 음악적 커리어 내내 발표한 작품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악기를 다루는 면에서는 퍼커시브한 터치를 기반으로 다이내믹 레인지가 큰 연주를 들려준다. 특히 오른손 피킹 테크닉 부분에 있어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러셀의 개인적 역량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줄을 마치 찢어버릴 듯한 힘 있는 펀칭감은 신체적으로 타고나지 않았으면 낼 수 없는 소리다. 특히 젊은 20~30대 시절의 연주를 들으면 이 부분은 확연히 드러난다. 일례로 뉴욕에서 러셀 말론과 젊은 시절부터 친분을 나눠왔으며 필자에겐 은사이기도 한 기타리스트 폴 볼렌백(Paul Bollenback)이 말하길, 음악가에게 필요한 여러 재능 중 특히 중요한 재능 두 가지를 꼽는다면, 뛰어난 음감과 함께 테크닉과 관련한 신체적 재능이 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두 부분 모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바로 러셀 말론이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러셀 말론의 음악은 위에 말한 것처럼 하드 밥(Hard-Bop)적인 부분이 전반적으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본인이 좋아했던 선배들의 음악을 충실히 복원하는 데에만 목적을 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름 연주에서 파격적인 모습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의 음악적인 범위가 그 이후 시대에 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 베니 그린(Benny Green)의 1999년도 발매작인 [These Are Soulful Days] 의 수록곡이자 블루스 넘버 Come on Home(호러스 실버의 오리지널)에 참여한 러셀 말론의 연주를 필자는 무척 좋아하는데, 두 번째 코러스 시작과 동시에 Eb minor 코드에서 A 마이너 펜타토닉을 연주하는 부분은 무척이나 듣는 이의 주의를 끈다. 짧은 4마디지만, 소위 말하는 이 묘한 아웃 사운드는 꽤나 도발적으로 듣는 이의 주의를 끌며 나머지 그의 솔로 전개에 더욱 몰입하게 해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준다. 또한 러셀 말론의 앨범 [All About Melody]의 곡 On the Real Side나 앨범 [Love Looks Good on You]의 Soul Leo와 같은 곡들은 모달(modal) 혹은 Non-Function Harmony 의 코드 진행이 쓰였으며 곡에 대한 접근과 즉흥연주에서 포스트-밥 적인 면모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2년전 내한 공연 당시 본지 편집장, 그리고 본 칼럼의 필자인 기타리스트 김준범과 함께 한 러셀 말론.
또한 러셀 말론의 음악은 여러 장르를 아우른다. 장르적으로 재즈에 보다 가까운 소울 음악부터 비교적 멀어 보이는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종류의 음악들을 재즈라는 장르에 거리낌 없이 녹여낸다. 이미 많은 인터뷰를 통해 언급했듯이 그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운명처럼 기타라는 악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흑인 교회 음악을 들으며 성장해 왔고 이는 그의 작곡과 연주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다 직접적으로 일본의 비너스 레이블에서 제작, 발매한 1999년도 앨범 [Wholly Cats] 에 담긴 Swing Low, Sweet Chariot 이라는 유명한 흑인 영가를 연주하는 한편 2010년 작 [Triple Play]의 Pecan Pie를 포함한 상당히 많은 그의 곡에서 가스펠적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2006년 작 [Live at Jazz Standard, Vol. 1]의 마지막 트랙 Malone Blues(Live) 에서는 그야말로 완전한 블루스 스타일을 연주한다. 인트로의 독주 부분에서는 컨트리 스타일과 슬로우 블루스를 넘나들기도 하며 이어서 밴드와 함께 연주를 진행할 때에는, 재즈 뮤지션이 연주하는 블루스(Jazz-Blues)가 아닌 블루스 맨이 연주하는 블루스(blues-blues)를 연주한다. 러셀 말론인지 사전에 모르고 그냥 이 트랙을 처음 듣는다면 아마 청자는 매우 훌륭하고 신선한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연주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그는 팝 넘버들도 즐겨 연주하였는데 2004년 1월에 있었던 뉴욕 기타 페스티벌에서 비지스(Bee Gees)의 유명 히트곡인 How Deep is Your Love를 연주한 것이 한 예이며, 그의 2010년도 앨범 [Triple Play]에 담긴 Honeybone 에서는 팝 음악적인 멜로디와 화성 진행 그리고 경쾌한 라틴리듬을 사용해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외에도 빌리 조엘의 가스펠 풍 명 발라드 And So It Goes, 휘트니 휴스턴이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R&B 발라드 Saving All My Love for You 같은 곡들도 자신의 레퍼토리에 기꺼이 포함시키는 유연함을 갖고 있었다.
Epilogue
필자는 그의 음악이 왜 그토록 따뜻하고 인간적으로 들리는지를 꽤 오랫동안 고민해보았다. 러셀 말론은 과거 iROCK Jazz 라는 온라인 재즈 커뮤니티와의 인터뷰에서 ‘왜 지금 시대에 재즈가 그토록 인기가 없어졌을까?’ 에 대한 질문에 이런 대답을 남긴 적이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재즈 연주가 너무나 힙(hip)하고 듣기에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에 있어 ‘불협(disonant)’과 ‘아웃을 위한 아웃(out for out sake)’ 이 너무 많아졌다고 답을 한다. 평론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음악을 하는 일부 뮤지션들을 꼬집기도 했었다. 그리고 끝으로 본인은 누군가에게 도전적으로 다가가는 음악을 하고 싶지 않으며,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로잡고 싶다고 말한다. 이 말은 관객들이 알만한 쉬운 음악만을 연주하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며 연주자가 자기 자신을 버린 채 매번 관객들의 취향만을 위해 희생하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그의 음악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매우 의도적으로, 화성적인 불협과 아웃이 들리는 때도 있다) 나는 이 조언을 음악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뮤지션 스스로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인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음악, 누군가에게 뽐내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 들리는 소리에 정직할 것, 그리고 본인의 인생을 음악에 담아낼 것, 본인이 듣는 소리를 그 순간에 연주해 낼 것. 이것이야 말로 뮤지션이 평생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실제로 2년 전 다시 만난 러셀 말론은 사람 자체에서 여유와 인간다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는 다름 아닌 그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음악에 있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웠던 그의 태도가 음악에 있는 그대로 담겨 있었으며, 바로 이점이 청자에게 솔직함과 따뜻함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의 기타 연주를 들으면 훈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불현듯 말을 건네던 그 얼굴과 표정이 절로 오버랩 되어 필자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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